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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표현, 중·고교 교과서에서 빠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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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2016년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이 교과서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폐기됐고, 새 교과서는 검정 체제로 집필돼 2020년부터 사용된다. [중앙포토]

지난 2016년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이 교과서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폐기됐고, 새 교과서는 검정 체제로 집필돼 2020년부터 사용된다. [중앙포토]

현재 초등학교 5학년과 중학교 2학년이 2020년 중·고교에 입학해 배우게 될 역사교과서에선 대한민국 체제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표현될 것으로 보인다. 또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해로 표시하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사용한 용어를 바꾸는 것이다.

집필기준 시안 공개, 내달 확정 #박근혜 때 ‘1948년 건국’서 되돌려 #문 대통령 작년 ‘1919년 건국’ 강조 #국가체제 자유민주주의 → 민주주의 #6·25 남침은 유지 … 천안함은 빠져 #보수 학자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정권 바뀔 때마다 집필 기준 달라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2일 중·고교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을 공개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워 취임 3일 만에 국정교과서 폐기를 지시했고 역사교과서는 민간출판사가 발행하는 검정 체제가 됐다. 이에 따라 교육부 위탁을 받은 평가원이 새 교과서를 위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시안을 지난해 8월이후 개발해왔다. 교육과정과 집필 기준은 다음달 확정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1948년 '국가 수립' 아닌 '정부 수립' 

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시안을 살펴보면 지난 국정교과서 편찬 과정에서 이념 논쟁이 일었던 용어와 내용 다수가 변경됐다. 국가 체제에 대한 표현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바뀌었다. 과거 역사 교과서에선 국가 체제를 민주주의로 서술했는데,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교육과정을 개정하면서 자유민주주의로 바뀌었고 국정교과서까지 이어졌다. 박진동 평가원 기획조정본부장은 "학계와 교육계에서 '민주주의' 용어로 수정하자는 요구가 많았고, '정치와 법' 같은 다른 사회과 교과목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고 있어 바꾸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진 시점으로 서술된다. 기존 교육과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표현했는데,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에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면서 논란이 일었다. 뉴라이트 등 보수 성향 학자들은 유엔 결의에 따른 남한의 총선거가 치러진 1948년을 건국 시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건국 시기를 1948년으로 보는 시각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동시에 시안에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표현이 빠졌다. 지난 교과서 집필기준에는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은 사실에 유의한다"고 적혀있었는데 관련 내용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시안에선 "남한과 북한에 들어선 정부의 수립과정과 체제적 특징을 비교한다"고 적시했다. 앞서 역사학계 전문가 자문단이 평가원에 제출한 "1991년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므로 적절치 않은 표현"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이다. 그러나 보수 성향 학자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집필기준 확정까지는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해 12월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독립유공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해 12월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독립유공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 3대 세습, 무력 도발 사건 언급 없어

앞서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충칭(重慶)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는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며 2019년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된다"고 말해 '1948년 건국'을 정면으로 반박한 바 있다. 박진동 평가원 본부장은 "학계의 통설과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입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적절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이번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은 과거보다 분량이 줄어든 게 특징이다. 고교 한국사 기준으로 국정교과서 당시엔 분량이 교육과정은 15쪽, 집필기준은 24쪽에 달했다.. 이번 시안은 교육과정 13쪽, 집필기준이 2쪽에 불과하다. 집필진의 자율성을 강화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존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서 강조됐던 사건 상당수가 삭제됐다.

특히 북한의 3대 세습, 핵 문제,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등 기존 국정교과서 집필기준에 상세히 제시된 사건들은 이번 시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북한에 관해 이번 집필기준은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안착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을 설명한다"고만 제시했다. 교육과정에서도 "남북 화해의 과정을 살펴본다"며 갈등보다는 화해에 초점을 맞췄다.

6·25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내용은 연구진 초안에선 등장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최종 시안에는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라고 명시했다.

역사교과서 교육과정 현대사 부분의 소주제 목록 비교

역사교과서 교육과정 현대사 부분의 소주제 목록 비교

'산업화' 시각 국정교과서와 달라져…부작용 강조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 대한 서술은 국정교과서와 크게 달라졌다. 시안은 "경제 성장은 정부와 국민이 이룬 성취라는 일국적 시각에 가두지 말고 세계 경제 변동 과정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제시한다"고 했다. 국정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을 기반으로 이룩한 경제 발전의 과정과 그 성과를 시기별로 서술한다"고 한 것과는 달라진 시각이다.

또 시안은 "양극화를 비롯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와 시민 사회 움직임을 서술한다"며 산업화 부작용을 강조했다. 앞서 국정교과서에선 '사회 문제'란 표현 대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서술한다"고 표현했다.

이 밖에 최근 심화한 주변 국가의 역사 왜곡에 대한 내용은 시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전 교과서 집필기준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포함했지만 시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독도의 경우 19세기 근대사 부분에서 "우리 영토로서 독도의 역사적 위상과 일제의 독도 편입 불법성을 제시한다"고 했지만, 최근의 역사 왜곡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박진동 평가원 본부장은 "교육과정이나 집필기준에 없는 내용이라고 해서 교과서에서 빠지는 건 아니다. 과거에도 '새마을운동' '동북공정' '북한 도발' 등을 집필기준에 넣지 않았지만 대부분 교과서가 다뤘다"고 설명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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