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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나의 ‘오춘기’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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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정치부 기자

김경희 정치부 기자

11월의 산사는 고즈넉하다 못해 으스스했다. 2014년 겨울 휴가차 홀로 템플스테이를 했을 때다. 어둠을 건반 삼아 산 전체로 울려 퍼지던 종의 연주, 굽은 등을 펴주는 듯한 스님의 목탁 소리….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만가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이 참 좋았다. 그런데 이 좋은 풍경보다도 가슴에 더 깊이 남아 있는 말이 하나 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아요.” 스님과의 차담 시간, 여의도의 한 대기업에 다닌다는 20년 차 직장인 A씨의 고백이다. 이제 막 3년 차 직장인이었던 나에게 ‘방전’이란 단어가 팍 꽂혔다.

그가 이곳에 혼자 온 이유는 딸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집에서 TV를 틀었는데 마침 당시 인기 예능프로인 ‘아빠 어디가’가 나오자 딸이 “아빠는 어디 안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평일에는 일에 파묻혀 살고 주말이면 소파와 한 몸이 되는 여느 가장의 모습이다.

스님이 열심히 인간의 108번뇌 극복법을 이야기하는 동안, 17년 후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아마도 가정을 이뤘을 것이고, 직장을 계속 다닌다면 ‘관리직’이 돼 있을 것도 같고,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우물쭈물하다 20년 차가 돼 있겠지. 또 그사이 몇번이나 인생의 ‘오춘기’라 불리는 시기를 겪게 되겠지.

오춘기는 요즘 말로는 ‘노잼 시기’다. 뭘 해도 흥미가 없고 일상에서 벗어나고만 싶은 시기 말이다. 최근에 잡코리아가 성인남녀 1322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니 10명 중 9명(91.1%)은 “노잼 시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노잼 시기는 대학생(89.7%)보다 직장인(92.8%)에게 좀 더 많이 찾아왔다. 취업이라는 인생의 한 과업을 이뤄냈다는 안도감과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 겹쳐졌기 때문일까.

고작 7년 차에 접어든 나로선, 20년 30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일 때가 있다. 그게 꼭 정답이라서는 아니다.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해 전문성을 쌓는 건 ‘대단한 일’이고, 직장 혹은 직업을 바꿔가며 다양한 삶을 즐기는 건 ‘부러운 일’이다.

“이렇게 다닐 수도 없고 이렇게 관둘 수도 없을 때 삼 년 차는 온다”고 독립서적인 『삼 년 차 직장인』의 저자가 말했다. 그렇게 5년 차도 오고 7년 차도 오고 20년 차도 오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봐야 한다는 것 아닐까.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김경희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