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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적폐청산 외치며 기업에 돈 걷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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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태희
박태희 기자 중앙일보 팀장
박태희 산업부 기자

박태희 산업부 기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렸던 지난달 4일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 판결을 맡은 김세윤 부장판사는 미르·K스포츠 재단을 통해 대기업으로부터 774억원 기금을 걷은 부분과 관련해 또렷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대통령은 기업의 존립과 활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그런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은 흔치 않다.”

이어 “비록 명시적 협박은 하지 않아도 지위를 이용해 출연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에 충분해 (직권남용과 함께) 강요죄 역시 유죄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업들이 문화·스포츠 진흥이라는 취지에 동의해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는 박 전 대통령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판결문 잉크가 채 마르기나 했을까. ‘강요’와 ‘자발’ 사이에서 정부와 기업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장면이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산업부가 대기업에 산업혁신운동(2·3차 협력사 지원) 명목으로 기부금 2700억원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대한상의 내에는 산업부 요청에 따라 이를 집행할 추진본부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번에도 산업부는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낼 뿐 강요한 적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산업혁신운동 대신 미르·K스포츠 재단,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명분 대신 문화·스포츠 진흥, 대한상의 대신 전경련을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 출연 배우의 얼굴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드라마가 아닐까. 대기업에 큰 돈을 ‘자발적으로 내라고 요구하는’ 스토리는 변한 게 없다.

국가가 기업에 조세 납부 이외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내세운 정부라면 기업들이 돈을 내겠다고 나서도 말려야 한다. 모든 ‘Give’에는 ‘Take’의 유혹이 따른다. 정경유착의 씨앗이 여기서 뿌려지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경유착이라는 낱말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취지를 제대로 받들 요량이라면 산업부는 ‘(중소업체 지원이라는) 포괄적 현안에 대해 (대기업 지원금이라는) 묵시적 청탁’을 해선 안 된다. 이는 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촛불 정신과도 맞지 않는다. 적폐청산을 외치는 정부가 또 하나의 적폐사(史)를 쓰는 우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박태희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