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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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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아트팀 기자

이지영 아트팀 기자

‘도보다리 벤치회담’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명장면이다. 두 정상이 연초록 봄 풍경 속에서 긴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통역 없이 같은 언어로 서로 통하는 사이.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깨우쳐준 장면이었다.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중단됐던 남북교류사업들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중 하나가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 사업이다. 분단 70년 동안 달라진 남북의 언어를 총망라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사전을 만들자는 뜻에서 2005년 시작됐다. 실무를 진행하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이하 ‘편찬사업회’)에 따르면 남북한의 일상어는 34%가 서로 다르고 학술용어 등 전문어는 64%가 다르다. 편찬사업회의 한용운 편찬실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일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남북의 의사는 말이 안 통해 같은 수술실에서 수술을 못 한다”고 말했다.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수록돼 있는 단어라 해서 어감과 쓰임새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일례로 남한에서 ‘직업이나 직책에 비하하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쓰이는 ‘∼질’의 경우 북한에서는 비하하는 뜻 없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또 ‘소행’도 남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지만 북한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북한 사람이 “소행이 얌전하다”고 말했다면 이는 칭찬이라는 얘기다. 남과 북이 상대의 말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선 사전이 필요한 상황이다.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된 것은 2009년까지다. 2005~2009년 5년 동안 총 20회의 남북공동편찬회의와 네 차례의 공동집필회의를 했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5·24 대북제재 조치로 공동 작업이 중단됐다. 2014년 7월 잠깐 재개되는가 했지만 2016년 다시 중단돼 오늘까지 왔다.

지난달 30일 찾아간 서울 마포 편찬사업회 사무실에는 설레는 봄기운이 물씬했다. “북측에 회의를 재개하자는 뜻을 전했다”고 밝힌 김학묵 사무처장은 “이번엔 개성에 공동사무소를 만들어 작업에 속도를 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내비쳤다.

현재 남북이 공동회의를 거쳐 『겨레말큰사전』 표제어로 선정해둔 단어는 27만여 개다. 그리고 12만여 개 표제어에 대한 풀이를 합의했다. 전체 공정률은 78% 정도다. 2008년 사전 공동편찬사업을 시작한 중국과 대만이 2016년 양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한자와 단어를 집대성해 『중화어문대사전』을 출간한 것을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도 사전(『조선어사전』, 1938)은 나왔는데…. 늦었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하는 봄이다.

이지영 아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