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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의 앵그리2030]⑥대체 뭘 보고 뽑나요?…블라인드 채용에 웃지 못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김정하(가명·26) 씨는 요즘 취업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든 공기업이든 딱히 정해둔 곳은 없습니다. 그냥 취업하고 싶을 뿐이죠. 경영학을 전공한 그의 학점은 4년 평균 4.1(4.5 만점)입니다.

그런데 이 우수한 학점을 써먹을 곳이 거의 없습니다. 곳곳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서 지원서에 학점을 기재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김 씨는 “치열한 경쟁 끝에 따낸 결과물인데 나로선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못 쓰게 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시내 대학교에서 채용공고가 붙은 게시판을 한 학생이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서울 시내 대학교에서 채용공고가 붙은 게시판을 한 학생이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정부는 지난해 7월 블라인드 채용 추진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현재 모든 공공기관이 입사지원서에 출신지·신체조건·학력·학점 등의 항목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블라인드 채용은 종류가 다양합니다. 어디까지 블라인드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정부가 추진하는 건 학력과 학점까지 가리는 가장 높은 수준의 블라인드 채용입니다. 정부는 블라인드 채용을 민간 부문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상입니다. 가이드북도 만들어 배포했죠. 민간 기업도 따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기업도, 취업준비생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합니다. 왜 그럴까요?

최종 학력, 학점까지 블라인드 사례 거의 없어

일단 역차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부는 ‘블라인드 채용이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설명합니다. 인종이나 나이·성별 등 인권과 직결된 차별을 차단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 맞습니다.

그러나 학력·학점까지 기재하지 못하게 하는 건 결코 보편적인 채용 형태가 아닙니다. 반대로 최종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경우를 찾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자료:고용노동부

자료:고용노동부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학점을 받은 것을 ‘개인의 성취’로 보기 때문이죠. 해외에선 채용을 외부 헤드헌팅 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많은데 이때도 학력과 경력은 가장 중요한 판단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핵심 정보를 빼라고 하는 건 성실한 지원자를 불리한 환경에 내모는 것일 수 있습니다. 김 씨는 “자기소개서에 성적 장학금을 받은 것도 쓰지 말라는 건 너무 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무엇으로 뽑느냐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지난 1월 취업정보 제공업체 사람인이 취준생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76.8%는 ‘블라인드 채용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실제로 블라인드 채용 전형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직자는 26.7%에 그쳤고, 73.3%는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답한 겁니다. 준비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71%(복수응답)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를 꼽았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직무 역량 평가 기준의 모호함’이었습니다. 취준생 이정호(28)씨는 “스펙이 부족한 게 이유라면 스펙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되는데 뭐가 부족한지 모르니 뭘 더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을 필요하다는 쪽에선 ‘학력과 학점 없이도 능력을 검증할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에 기반을 둔 능력중심채용을 예로 듭니다.

NCS는 산업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기술·소양 등을 부문별·수준별로 구체화한 겁니다. 현재 24개의 대분류 아래 897개의 직무로 분류돼 있습니다. 예컨대 경영·회계·사무(대분류) 분야 아래엔 경영평가·기업홍보·고객관리 등 27개의 세부 직무가 있습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공공기관은 2015년부터 NCS 기반 채용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직무능력을 가졌는지 어떻게 평가할까요? 자기소개서에 관련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라지만 결국 성패는 필기시험에 달려 있습니다.

직무에 따라 시험 과목도 달라지는데 전산직은 프로그래밍 등의 지식을, 경영직은 인사와 사무 행정 관련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을 치릅니다. 학점은 안 된다면서 결국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 거죠.

능력만 본다는 NCS 채용도 시험이 성패 갈라  

개발자나 디자이너처럼 직무가 명확하고, 전공과 직업이 비교적 일치하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인문계열 전공자가 특히 그렇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한 A씨가 공기업에 입사하길 원한다면 1학년 때부터 전공 수업은 듣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 시간에 특정 직무를 정해 NCS 시험 준비를 하는 게 훨씬 유리합니다.

취준생 손승희(27)씨는 “4년 내내 취업 준비만 해야 한다면 대체 대학이 직업학교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했습니다.

[중앙포토]

[중앙포토]

셋째, 블라인드 채용이 공채 시스템과 공존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서구 기업에선 수시채용이 일반적입니다. 채용 시기를 따로 두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뽑습니다.

면접은 인사팀이 아닌 현업 부서가 직접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터뷰를 중시하고, 써본 뒤 채용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이 잘 갖춰진 것도 특징이죠.

반면 한국은 채용 인원을 정해두고 한꺼번에 뽑는 공채를 합니다. 전 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공채는 드뭅니다. 한국과 일본 정도에서만 눈에 띄죠. 공채는 직무별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대략의 인원 할당만 하고, 채용한 다음 나중에 세부 직무를 부여하죠.

이렇게 한 번에 많은 인원을 뽑아야 하는 공채에서는 창의적인 채용방식을 도입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인사담당자들은 “수백, 수천 명을 뽑는 데 직무능력을 기준으로 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입을 모읍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공채는 보통 범용 인재를 뽑기 때문에 입사 직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기 어렵습니다. 추가적인 교육 비용이 발생하는데 지금은 이를 기업이 부담합니다.

그런데 기업이 ‘이미 준비된 사람을 뽑겠다’고 하면 준비를 해야 할 부담은 누가 져야 할까요? 대학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설사 있다 해도 대학이 취업 사관학교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블라인드 채용 어떻게 변해왔나?>

자료:고용노동부

자료:고용노동부

결국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교육·훈련의 책임이 누구의 몫이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직무능력만 강조하면 결국 지원자의 부담만 커진다는 얘기죠. NCS 기반 채용 관련 사교육 시장이 이미 공무원 시험만큼 활성화돼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블라인드 채용이 공정하다는 연구 어디에도 없어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학점, 영어성적 같은 최소한의 요건이 있으면 적어도 말도 안 되게 자격이 떨어지는 지원자를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정량적 지표를 가린 채, 정성적 평가만 강조하면 담당자나 면접관이 눈에 안 보이는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더 커진다.”

블라인드 채용이 오히려 적발하기 어려운 ‘블라인드 부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죠.

지원자에게 장점을 물으면 하나같이 ‘열정’이라 답합니다. 단점을 물으면 대부분이 ‘고집’이라고 하죠.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없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외웠다가, 답 찾기만 해온 주입식 교육의 폐해죠.

선생과 학생이 철저히 분리된 편의주의적 교육은 대학에 간다고 별반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연히 지원자는 특색이 없고, 기업은 가려낼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학력과 스펙에 기대는 풍조가 생긴 이유죠.

이 때문에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블라인드 채용이 답인 양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민간도 따르라고 하는 건 어디에도 유례가 없습니다. 블라인드 채용 추진계획은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지 단 12일 만에 나왔습니다.

곧바로 전 공공기관으로 확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죠. 시범사업을 하고, 부작용은 없는지 검토한 뒤 진행해도 늦지 않을 일인데 말이죠. 정책이 현장에 뿌리내릴 때 가장 중요한 건 ‘디테일’입니다. 이걸 놓치면 방향이 아무리 옳아도 산으로 갑니다. 요즘 청춘들, 이래저래 피곤합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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