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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은 8년 만의 우승 뒤엔 … 사랑 그리고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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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지난해 매경오픈 당시 양용은의 캐디를 맡은 이승철(왼쪽). 이승철은 ’가능하면 벙커에 넣지 말라고 했는데 첫 홀부터 벙커로 보냈다“며 웃었다. [김경빈 기자]

지난해 매경오픈 당시 양용은의 캐디를 맡은 이승철(왼쪽). 이승철은 ’가능하면 벙커에 넣지 말라고 했는데 첫 홀부터 벙커로 보냈다“며 웃었다. [김경빈 기자]

최근 발간된 전기 『타이거 우즈』에 따르면 우즈는 2009년 PGA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상대인 양용은(46)을 압박하기 위한 3가지 방법을 썼다. 말 걸지 않고 무시하기, 슬로 플레이, 퍼트할 때 이동해 관중 소란스럽게 하기다.

‘여친’ 김미진 전 아나운서가 캐디 #골프 잘 못하지만 심리 안정 도와 #가수 이승철, 8년간 변함없이 응원 #“독도공연 탓에 일본 못 가 아쉬움”

지난달 29일 일본프로골프투어 더 크라운스에서 우승한 뒤 귀국한 양용은을 30일 만났다. 긴 슬럼프를 딛고 8년 만에 우승한 그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당시 우즈가 그렇게 한 걸 전혀 못 느꼈다. 경기위원이 와서 경기 속도가 느리니 빨리 쳐야 한다고 하기에 속으로 ‘늦게 치는 건 우즈인데 왜 나한테 와서 그러나’하고 생각한 적은 있다. 경기에 집중해 타이거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양용은은 묵묵히 길을 가는 우직한 황소 같은 스타일이다. 그 우직함을 앞세워 메이저대회에서 우즈를 상대로 역전 우승을 거둔 유일한 선수가 됐다. 우직함은 단점이기도 하다. 양용은은 PGA 챔피언십 우승 이후 옛 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지인의 부탁을 들어주다 몇 차례 사기를 당했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남자 골프 메이저 챔피언인데 그에 걸맞은 대중의 호감과 부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양용은은 “승합차에 물건을 가득 실은 뒤 어린이 보호시설에 기부 활동도 했다. 그러나 남에게 보여주려 한 게 아니어서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시상식에서 더 크라운스 우승 트로피를 함께 든 양용은과 김미진(왼쪽)씨. [성호준 기자]

지난달 29일 시상식에서 더 크라운스 우승 트로피를 함께 든 양용은과 김미진(왼쪽)씨. [성호준 기자]

제주도 출신인 양용은은 스무살 때 처음 육지로 나왔다. 더덕 농사를 짓던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성실함 뿐이었다. 양용은은 골프 선수는 골프만 잘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는 5년 전 아내와 이혼했다. 이후 목 디스크까지 겹쳐 성적이 부진했다. 어느덧 40대 중반, “양용은은 이제 한물 갔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다 일본 투어 더 크라운스에서 8년 만에 우승을 한 것이다.

이 대회에선 그의 여자친구인 김미진(40)씨가 캐디를 맡았다. 전직 아나운서인 김씨는 양용은과 비슷한 시기에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양용은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뒤 여자친구 김씨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김씨는 캐디백을 메지 않고 골프 클럽을 전동카트에 싣고 다닌다. 리모컨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카트를 130만원 주고 샀다고 했다. 김씨는 “본전을 뽑으려면 최소한 2경기는 해야 한다고 했는데 카트를 산 지 두 번째 대회 만에 덜컥 우승했다”며 좋아했다. 양용은은 “미진씨가 일본 투어 퀄리파잉 스쿨과 2개 정규 대회에서 캐디를 맡았다. 퀄리파잉스쿨에선 1등을 했고, 2차례 대회 중 한 번은 우승을 차지했으니 성적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우승 축하 파티에서 즐거워 하는 양용은과 이승철(왼쪽). [이승철 인스타그램]

지난달 30일 우승 축하 파티에서 즐거워 하는 양용은과 이승철(왼쪽). [이승철 인스타그램]

김씨가 캐디를 맡은 뒤 하는 일은 가방을 끌고 공을 닦는 일 뿐이다. 거리와 경사 체크는 물론 벙커 정리도 양용은이 직접 한다. 양용은은 “몇 년간 성적이 좋지 않아 전문 캐디에게 보너스를 주지 못해 미안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마음 편하게 미진씨에게 캐디를 맡겼다”고 말했다. 골프 황제 우즈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양용은은 캐디에게 넉넉한 급료를 못줄까 봐 걱정하는 선수다. 김씨는 캐디 일이 서툴러 다른 선수의 눈총도 받았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씨는 “용은씨는 우승에 가까워지면 서두르다 훅을 내서 게임을 망치는 경향이 있다.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15번 홀부터 갑자기 걸음이 빨라지고 급해지기에 일부러 물을 주고 천천히 하라고 진정시켰다”고 말했다.

30일 양용은과 김미진씨는 가수 이승철(53) 부부와 함께 축하 파티를 했다. 이승철씨는 양용은과 절친한 사이다. 이승철은 마스터스나 디 오픈 등 메이저 대회에 따라가 요리를 해주면서 양용은을 응원했다. 양용은은 “경기가 안 될 때 승철 형에게 위로를 받았고, 사회생활의 ABC도 형한테 새로 배웠다. 성적이 나빠도 변치 않고 응원해 준 형이 없었으면 다시 우승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룹 부활로 시작한 가수 이승철이 양용은의 ‘부활’ 을 이끈 것이다. 이승철씨는 양용은이 일본 대회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워했다. 2015년 독도 공연을 한 뒤 일본 입국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용은이와 미진씨가 트로피를 함께 들고 있는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된다는 내 노래 가사가 연상됐다”고 말했다.

김미진씨는 “내 골프 스코어는 100타도 안 되지만 가끔 용은씨에게 ‘손에 힘을 빼고 하체를 이용하라’는 레슨도 한다”며 웃었다. 양용은은 3일 개막하는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GS칼텍스 매경 오픈에 출전한다. 이번엔 김미진씨가 아니라 양용은의 지인이 가방을 멘다. 양용은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 든든하고 큰 힘이 된다”면서 “이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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