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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노동절과 직장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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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릿한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작가 김훈이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썼듯이,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 행태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유독 거셌던 건 ‘아무 도리 없이’ 밥벌이에 나서야 했던 보통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기 때문이다. 반말과 욕설, 폭행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특히 직원을 향해 월급에서 까네 어쩌네 하는 조현민의 폭언을 들으며 울컥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한진 사태는 정부 부처의 조사와 처벌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일터의 조직문화를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직장민주화의 전기(轉機)로 삼아야 한다. 첫째, 오너의 황제 경영 시대는 이제 지났다. 앞으로 오너라는 이유만으로 조직에서 군림하고 대접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경영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지 않으면 지배주주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시장의 압력이 점점 커질 것이다. 한진그룹 오너와 같은 일탈행위는 자본주의의 꽃인 기업 이미지를 훼손하고 이는 결국 기업을 옥죄는 과도한 정부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갑질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재벌 오너야말로 시장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체제 전복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직적 기업 문화와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한진그룹 오너의 갑질이 뒤늦게 불거진 데는 상명하복과 위계 서열을 중시하는 기업의 조직문화도 한몫했다. 의사소통이 잘되는 수평적 조직이었다면 그런 갑질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고, 설령 갑질이 있었더라도 곧바로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오늘은 128주년 노동절(메이데이)이다. 1886년 8시간 노동을 요구한 미국 시카고 노동자의 총파업을 계기로 1890년부터 전 세계에서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선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동조합총연맹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고, 박정희 정부 때인 63년 ‘근로자의 날’로 명칭을 바꿨다가 94년 김영삼 정부에서 기념일을 5월 1일로 다시 옮겼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했다. 노동계가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 카카오톡 오픈채널 ‘직장 갑질 119’ 같은 생활 속의 작은 진보를 보여주길 바란다. 그래야 고작 10%에 그치는 노조 조직률에서 탈피해 나머지 90% 노동자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직장민주화를 위해 노사가 서로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