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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창법 만든 건 40년 전 TBC서 들은 ‘한오백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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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호 25면

[박정호의 사람풍경] 데뷔 50년 맞은 ‘가왕’ 조용필 

조용필이 50주년 무대에 사용할 기타를 바라보고 있다. 기타 넥(neck) 부분에 한자 ‘도울 필(弼)’자가 적혀 있다. 그는 ’20집 앨범은 내년에나 나올 것 같다. EDM(Electronic Dance Music) 등 신곡 몇 개를 만들었지만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용필이 50주년 무대에 사용할 기타를 바라보고 있다. 기타 넥(neck) 부분에 한자 ‘도울 필(弼)’자가 적혀 있다. 그는 ’20집 앨범은 내년에나 나올 것 같다. EDM(Electronic Dance Music) 등 신곡 몇 개를 만들었지만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반세기다. ‘고독한 러너’ 조용필(68)이 데뷔 50년을 맞았다. 최초·최고·최다 등 그에게 붙은 기록 뭉치는 어쩌면 군더더기다. ‘가왕’이란 수식어 뒤에 숨은 ‘인간’ 조용필은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화장기 없는 한마디 한마디가 큰 울림을 준다. 이달 초 한국 예술단의 평양 방문에서 ‘친구여’를 목놓아 불렀던 그의 모습도 선하다.

고3 때 기타리스트로 음악 시작 #입대한 보컬 대타로 얼결에 마이크 #음악은 중독, 국·영·수에선 못느껴 #노래도 공부, 죽을 때까지 배워야 #‘돌아와요 부산항에’ 뜬 뒤에야 효도 #남북정상회담 후 문화교류 늘었으면

조용필은 다음달 12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를 시작으로 50주년 전국 투어에 나선다. 그와 마주한 지난 23일 봄비가 전국을 적셨다. 그의 히트곡 목록을 뒤져보니 흥미롭게도 비를 노래한 게 거의 없다. 사랑·이별·꿈 등을 읊어온 그가 왜 비를 꺼렸을까. “비는 좋은 거지만 과하면 안 된다고 항상 생각해요. 장마가 그렇잖아요.”(웃음)

내달 12일 잠실운동장서 전국 투어 스타트

하지만 그는 비와 인연이 깊다. “2003년 잠실운동장 첫 무대 때 보슬비가 내렸죠. 2005년 평양 단독 콘서트를 다녀온 뒤에 연 잠실 공연에서도 비가 쏟아졌고요. 이번에도 비가 올 수 있어요. 무대도, 음향기기도 대비하고 있습니다.”

가왕 50년을 축하하며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선물했다. 오래 전 사석에서 “평소 시집에서도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의 말이 기억나서다. ‘정한의 가수’ 조용필과 ‘노동의 시인’ 박노해가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사람과 희망’이라는 두 단어에선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가왕의 60년, 70년도 기대했다.

서울 서초동 YPC 프로덕션 입구에 있는 조씨의 공연 현장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서초동 YPC 프로덕션 입구에 있는 조씨의 공연 현장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불후의 명곡’ 3주 연속 특집이 화제입니다. 많은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았어요.
“과찬입니다. 사실 내가 크다는 생각은 안 해요. 띄울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닌데, 진짜 부끄럽기도 하고…. 그냥 음악이 좋아서 쭉 해왔어요. 하다 보니까 기록도 생기고…. 일부로 도전한 게 아닙니다.”
가왕도 롤모델이 있을까요.
“비틀스를 참 좋아했어요. 롤링스톤스도 그렇고. 당시 유명했던, 그런 곡을 만드는 게 꿈이었죠.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아 롤모델까지는 아니죠. 무엇보다 그들의 작곡 능력이 대단해요. 동양과 서양의 정서가 다르지만 영국 사람들이 노래를 만드는 게 큰 배움이 됐어요.”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했습니다.
“요즘도 그래요. 다 배우는 겁니다.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만 배우세요, 뭘 또 배울 게 있나요’ 하는데, 그건 말이 안돼요. 최신 음악을 매일 듣습니다.”  
배우 안성기가 중학교 동창입니다. 그는 학생 조용필을 ‘모범생’으로 기억하던데요.
“칭찬이겠죠. 집에 기타가 있었어요. 아마 형이 대학 때 친 것 같아요. 중2 때 혼자 뚱땅~ 대며 짚어보고, 또 짚어보았죠. 공부하면서 최동욱·박원웅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도 늘 들었고요. 기타는 고3 때 본격적으로 쳤습니다.”

비틀스·롤링스톤스 작곡 능력 부러워해

서울 서초동 YPC 프로덕션 연습실 풍경.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서초동 YPC 프로덕션 연습실 풍경.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모범생이 가출도 시도했고요.
“들락날락 여러 번 했죠. 70년인가, 형에게 붙잡혀 대학 간다는 조건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다시 뛰쳐나갔죠.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운명인 것 같아요.”
운명이란 단어를 즐겨 씁니다.
“악기는, 음악은 중독입니다. 좋은 노래를 한 곡 한 곡 카피해 이뤄나가는 만족감이 대단해요. 국어·영어·수학에선 느끼지 못했던 거죠. 처음에는 팝송만 따서 연주했죠.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으니까.”
부모님 음악 유전자를 받았나요.
“직계가족, 친척 중에 음악하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놈’이랄까요. 그때만 해도 딴따라는 불량배 비슷하게 취급했죠. 부모님이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면서 인정 받았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게 됐어요. 큰아들 노릇을 한 거죠.”
출발은 기타리스트입니다.
“노래는 대역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내가 있던 밴드 노래를 60~70% 맡은 베이스기타가 영장 받은 지 사흘 만에 군에 가야 했어요. 밤새 레퍼토리를 외우고 간신히 무대에 섰죠. 그것도 운명인 모양입니다.”
‘창밖의 여자’로 80년대를 열었습니다.
“그 전에 방송금지 시기가 있었죠. 정확히 2년 7개월입니다. 그때 참 다양한 음악이 히트했어요. 이탈리아 칸초네, 프랑스 샹송, 라틴 음악도 있고, 미국 솔(soul)이나 록도 있고 그런 음악을 접하다 보니까 도움이 많이 됐죠. ‘단발머리’도 만들었고요.”
시련을 통해 더 단단해졌습니까.
“절대 시련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그 시기가 있었기에 외국 유명음악을 더 공부하게 됐습니다. 방송에는 못나갔지만 나이트클럽 무대에는 계속 설 수 있었죠.”
민요 ‘한오백년’도 그때 만났고요.
“TBC 다큐에선가, 낙동강 나룻배 사공이 노를 젓고, 소복을 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흐르는 거예요, ‘세상에 저런 음악이 있구나’ 충격을 받았죠. ‘한오백년’ 음반을 9~10개 구해서 다 들어봤어요. 건반에 얹어보니 음계가 안 맞아서 양악에 맞게끔 부른 게 ‘한오백년’입니다. 이후 남도창, ‘흥부전’ 판소리까지 찾아봤죠.”
판소리로 탁성(濁聲)을 얻었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고 흉내를 내다보니까 오늘의 조용필 창법이 된 거죠. 오리지널은 아닙니다. 국악의 묘미를 알게 되니까 꽹과리를 쳐보고, 사물놀이도 해보고, 조상현 명창도 따라다녔어요.”

다시 태어나면 밥 딜런처럼 통기타 가수로

숫자로 보는 조용필 50면

숫자로 보는 조용필 50면

어린 시절 미성도 달라졌고요.
“탁성을 익히면서 솔(soul)과 록도 소화하게 됐어요. 목에서 피를 흘렸다는 말도 있던데 그건 거짓말입니다. 탁성이라는 게 소위 가래 끓는 소리잖아요. 남자 목소리를 여자 키로 올려야 하는데 미성으로는 불가능해요. 판소리 창법으로 목소리 변화를 가져온 거죠.”
일반인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조상현 명창도, 박동진 명창도 처음엔 미성이었다고 해요. ‘창조는 모방에서 나온다’는 절대적으로 맞는 얘기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똑같이 흉내 내려고 시작했고요. 그러면서 저만의 스타일이 생겼습니다.”
가수란 무엇일까요. 종류가 많습니다.
“음악이 뭐겠어요. 사랑·슬픔·기쁨·외로움 등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갈래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1940~50년대 미국 같으면 ‘전쟁하지 말자’라는 얘기를 하고, 요즘 같으면 랩으로 사회풍자도 하고…. 나는 동심도, 사랑의 슬픔이나 우정도 노래했죠. 서울올림픽을 하니까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고, 한강에 관한 노래도 하나 있었으면 해서 ‘한강’도 만들고. 내가 어느 갈래에 속하려나, 그건 대중이 더 잘 알겠죠.”
원조 오빠입니다. 냉동인간설도 있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헬스클럽에서 PT(Physical Training)를 받아요. 그것도 중독이죠. 운동도 안 하다 하면 여기저기 땅기잖아요. 목소리도 자꾸 써줘야 녹슬지 않고요.”
숱한 팬이 있어도 외로움이 크겠죠.
“2003년 아내가 떠나고 무척 힘들었죠. 항상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 혼자 오래 살아서 이젠 괜찮아요. ‘연애 안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어요. 진짜로.”
요즘 태어났으면 아이돌이 됐을까요.
“에이, 아이돌은 안 할 것 같아요. 춤을 춰야 하잖아요. (웃음) 밥 딜런이나 에드 시런처럼 통기타 하나 가지고 혼자 노래할래요. 다만 초등학교 시절로 한번쯤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뭐든지 흡수력이 제일 빠른 때잖아요. 내 또래가 되면 알 겁니다.”
최근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동안 끊어졌던 문화교류가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한반도 평화는 누구나 바랄 테니까요.”


실제 무대 같은 연습실, 장비 가격만 60억 … 생일에도 리허설

5월 공연에 사용할 가수 조용필 씨의 기타.

5월 공연에 사용할 가수 조용필 씨의 기타.

조용필을 만난 곳은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2층 연습실이다. ‘가왕’의 음악이 태어나고, 익어가는 장소다. 크기는 약 100㎡(30평). 가왕이 이끄는 밴드 ‘위대한 탄생’의 본거지다. 기타·베이스·드럼·건반 등 악기는 물론 녹음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방음시설은 기본이다. 장비 가격만 6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조용필은 지난 3월 21일부터 50주년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매주 수·토·일요일, 1주에 3회 연습을 한다. 우연히도 3월 21일은 가왕의 생일. “생일 잔치는 했느냐”고 묻자 “그런 것 없다.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축하 케이크도 없었다. 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밤 11시까지 연습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연습실은 관객 없는 공연장 같았다. 가왕은 노래를 하며 개별 악기를 실시간 모니터링한다. 곡마다 다른 악기별 음량·음색·리듬을 점검한다. 연출·조명·중계감독 등 스태프도 동석해 라이브 무대를 미리 살펴본다. “연습이 곧 실전”이라는 그의 소신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곳에서는 이달 초 평양에서 두 차례 열린 남한 예술단의 합동 연습도 진행됐다. 이선희·최진희·백지영·서현·정인·알리 등이 ‘위대한 탄생’과 호흡을 맞췄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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