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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60대 이상 잡아라,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지방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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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의 정치속으로

전국서 노인 공약 … 실버 민주주의

최다 투표층 40대서 바뀌어 #노년층의 정치 확대 불가피 #실버 치우친 정책·공약 봇물 #세대간 복지부담 격차 우려도 #투표 불균형 바로잡기 위해 #18세 투표권 부여 도입할만

6·13 지방선거 유권자 네 명 중 한 사람은 60대 이상이다. 4년 전 지방선거 때만 해도 40대가 가장 많고 60대 이상은 그 다음이었지만 이번엔 순위가 서로 바뀌었다. 20·30·40대를 합친 유권자보다 60대 이상 노년층이 많은 지역이 전국 226개 시·군·구의 40%를 웃돈다. 전남 고흥 등 4곳은 아예 60대 이상 만으로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겼다. 가뜩이나 지방선거는 총선·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훨씬 낮은데 60세 이상은 상대적으로 투표율도 높다. 6월 지방선거는 노인 표심이 선거 판도를 좌우하는 ‘실버 민주주의’다.

민주평화당 소속 황주홍 의원 지역구인 전남 고흥군은 군수 자리를 놓고 더불어민주당과 민평당 후보가 팽팽하게 맞선 뜨거운 선거구다. 선거 결과에 따라 호남 대표성을 어느 당이 잡느냐의 정치적 의미가 더해진다.

하지만 실제 선거전은 조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고령화와 인구감소가 가장 뜨거운 이슈다. 군내 사망자 수가 신생아 수를 넘어선 ‘데드 크로스’현상이 지속돼 한 때 20만 명을 웃돌던 군 인구는 이제 6만7000명이 무너진 상황이다. 모든 관심과 논의가 인구 문제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고흥, 60세 이상으로 전체 유권자 절반 넘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고흥 군수에 도전하는 민주당 공영민 후보의 대표 공약은 ‘떠나는 고흥을 돌아오는 고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공 후보는 “어차피 고령화를 피할 수 없는 만큼 어르신이 가장 살기 편한 고흥을 만들겠다”며 “전국에서 가장 크고 좋은 게이트볼 경기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제주도 기획관리실장 출신인 그의 세일즈 포인트는 “인구 60만 명이 무너진다는 제주의 위기감을 관광 활성화로 돌파했다”는 경력이다.

민평당 송귀근 후보는 ‘찾아 움직이는 노인 복지 실현’으로 맞서고 있다. 선관위에 예비후보 등록을 한 뒤엔 곧바로 노인 복지시설인 ‘녹동 어울림’을 찾아 화장실 청소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광주시 행정부시장 출신인 송 후보는 “60대 중반이면 가장 젊은 게 마을 현실이어서 모든 이슈가 노인 문제로 귀결된다”며 “노인복지시설을 크게 확충하는 등의 획기적인 노인 사회복지 정책을 곧 내놓겠다”고 말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38.3%에 달하는 고흥군은 전국 1위 고령화율 지역이다. 각 당과 입후보자들이 실버 유권자의 마음을 잡기 위한 정책과 공약에 집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군수 자리를 놓고 다투는 두 사람의 1 대 1 TV 토론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에선 모두 ‘실버 세대를 위한 복지 정책을 놓고 이런저런 주문과 요구를 받고 있어 TV 토론은 그런 이슈로 맞붙을 게 틀림없다’고 내다봤다.

군 단위 90% 이상 실버 세대가 선거 좌우

고령화가 물론 고흥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을 놓고 보면 절반 수준인 110개 시·군·구에서 60세 이상 유권자 비율이 거의 절반을 향하고 있다. 군 단위로 가면 좀 더 뚜렷하다. 전체 82개 군 중 76개 지역에서 60세 이상 실버 세대 비율이 30%를 넘어 실질적으로 선거 판도를 좌우하게 됐다. 행정안전부의 지난 2월 조사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 4210만여 명 중 60대 이상은 1075만여 명으로 25.2%였다.

정치권은 2030 세대를 위한 정책이나 공약보다 실버 세대를 위한 정책과 공약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이다. 군 단위 전체 복지 예산 중 노인 복지 예산은 이미 대부분 지역에서 60%를 웃도는 상황이다. 정부 예산만 놓고 봐도 기초연금은 아동복지예산의 두 배가량인 12조 원에 달한다.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혜택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선 노인 일자리 사업과 건보료 지원 확대 외에 간병비와 목욕·이발비 지급 강화 등의 약속이 전국 선거 현장에서 봇물이다. 함진규 자유한국당 정책위의장은 “선거는 결국 공약으로 결판난다”며 “이번 지방선거는 일자리 문제로 승부를 볼 생각이고 획기적인 노인 일자리 대책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고령 대국 일본선 고령 예산 30년만 거의 3배

실버 민주주의는 고령 대국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신조어다. 고령화 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이들의 의사가 정책 결정을 좌우하고, 노인에 치우친 정책이 쏟아진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실버 유권자가 정당이나 지역보다 복지나 일자리 등 본인에게 유리한 정책을 보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연금과 의료 이슈가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변수로 떠올랐다. 이에 따른 세대간 복지 부담의 격차가 편중되게 나타난다는 의미도 담겼다.

실제로 지난 2006년 자민당 정권은 고령층 의료비 부담을 10%에서 20%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다 동결하는 등 갈팡질팡하다가 다음 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현상유지 비용을 추경 예산으로 마련했다. LG 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전체 복지 예산 중 고령자에 대한 예산 비중은 1973년 25%에서 30년 만에 68.3%로 높아졌다고 한다.

일본처럼 뚜렷하진 않지만 미국 역시 베이비 부머들은 내는 세금에 비해 받는 혜택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흩어지면 죽는다’(Divided We Fall)란 구호를 내건 미국 은퇴자협회는 미 상·하원 의원의 90%가 회원이다. 건물 자체가 백악관 바로 앞에 있는데 은퇴자의 이익에 반하는 법령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는 움직임엔 다양한 방법으로 의회에 압력을 가한다.

경희대 서정건 교수는 “반년 앞으로 다가온 미국 중간선거에선 오바마 케어가 다시 이슈로 부상 중”이라며 “8년 전 새 건강보험 도입에 대한 불안감이 오바마에게 패배를 안겼다면 지금은 트럼프 행정부가 무턱대고 없애려 하면서 반발이 커지고 있다”고 ‘백인 노년층’을 흔드는 표심을 분석했다. 서 교수는 “노년층을 위한 메디케어가 도입될 당시만 해도 25% 정도의 지지를 받았지만 지금 미국 현실에서 이 제도를 송두리째 없애려는 정치 움직임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역대 주요 선거 연령대별 투표율이 승패 갈라

대체로 20, 30대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 성향 정당이 유리하고, 60세 이상 실버 세대 투표율이 높으면 보수 정당에 좋은 결과를 안겼다. 또 전체적으론 투표율이 낮으면 조직력이 강한 정당이 유리하고 소수 정당 혹은 신생 정당은 불리했다. 자유한국당은 젊은 세대 투표율이 저조하면 지역 기반이 튼튼하고 60대 이상에서 큰 지지를 받는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역대 주요 선거를 보면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비교적 단일한 성향을 나타내는 집단의 영향력은 여러 차례 선거에서 이미 확인됐다.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겨뤘던 2002년 대선에서 승패를 가른 건 2030의 힘이었다. 20, 30대만 놓고 보면 노 후보가 61.1%, 이 후보는 32.6%로 더블 스코어였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20, 30대가 차지하는 유권자 비율은 48%에 달했다.

10년 뒤 치러진 2012년 대선에선 인구지형 변화로 20, 30대는 38.3%로 주저앉았다. 여기에다 60대 이상 투표율이 80% 이상 치솟고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져 박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꺾을 수 있었다. 특히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싸우면 이기는 불패 기록을 남긴 배경엔 이런 유권자 변화와 낮은 투표율의 영향이 컸다.

한국 선거선 ‘고령화=보수화’ 등식 안 통해

이에 따라 ‘실버 민주주의 역습’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가파른 고령화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고착화되면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화되는 것 아니냐는 경계심이다. 하지만 ‘고령화=보수화’라고 말할 수 만도 없는 게 1년 전 대선 결과다. 문재인 후보는 홍준표 후보를 역대 최다표차(557만여표)로 눌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가 컸지만 60대 이상 투표율은 79.1%로 과거 대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대 한정훈 교수는 “‘고령화=보수화’라는 게 전통적 연령 이론이지만 꼭 그렇게 볼 수 없다”며 “한국의 60~70대 노인은 우리의 여러 여건 상 노인 복지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어 건강보험, 큰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고 말했다. 동성애와 같은 사회 문제엔 보수적 입장에 변화가 없지만 작은 정부와 같은 보수 정부 정책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란 뜻이다.

안보나 이념에 덜 민감한 세대가 새로 60대 이상에 진입하면서 진영 논리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복지 정책에 주목하는 투표 성향의 분화가 나타날 거란 주장도 있다. 정당이나 지역보다 정책 중심 선거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서울대 박철희 교수는 “실버 민주주의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세대간 투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은 18세 투표권을 도입했는데 우리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