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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50년 "음악은 운명이다. 난 열심히 흉내 냈을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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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작업실에서 만난 조용필. 다음달 시작되는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함께할 그의 기타에는 한자로 '필(弼)'이라고 적혀 있었다. '돕다'는 뜻이 담겨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3일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작업실에서 만난 조용필. 다음달 시작되는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함께할 그의 기타에는 한자로 '필(弼)'이라고 적혀 있었다. '돕다'는 뜻이 담겨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용필(68).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가왕’이니 ‘전설’이니 하는 수식어보다 "그저 가수 조용필로 남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지난 50년 동안 그의 노래는 시대를 막론하고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인간 조용필은 어떤 모습일까. 정말 음악밖에 모르는 연습벌레요, 아니면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선생님일까.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작업실에서 만난 조용필에 대한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렇게 얘길 많이 했는데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느냐” “언론이 날 왜 이렇게 띄워주는지 모르겠다”며 쑥스러워하는 그는 여전히 소년 같았고, “지금도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죽을 때까지 배우다 갈 것”이라는 욕심과 집념은 성공 뒤에 숨겨진 노력을 가늠케 했다.

◇생일에도 리허설은 계속된다…연습벌레 조용필

조용필은 숱한 기록에 겸연쩍어 하다가도,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반짝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용필은 숱한 기록에 겸연쩍어 하다가도,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반짝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3월 21일부터 공연 연습을 시작하셨다고요. 그날이 생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여기서 리허설했어요.”

- 깜짝 생일파티는 없었는지요.
“그런 거 없어요. 미리 다 얘기를 했죠. 생일이면 생일이고, 리허설이면 리허설이지, 생일 같은 거 절대 말도 꺼내지 말라고. 그날도 점심 때쯤 모여서 밤 11시까지 연습했는 걸요.”

-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오면서 찾아보니 비에 관한 노래가 거의 없더라고요. ‘비 오는 거리’와 ‘내 가슴에 내리는 비’가 있긴 합니다만.
“왜 그럴까. 비는 참 좋은 거지만, 비가 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요.
“공연만 하면 비가 오잖아요. 2003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35주년 기념 공연할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비 오고. 그래도 그때는 큰비가 아니고 보슬비였어요. 그런데 2005년에 평양에 갔다 와서 역시 잠실에서 공연하는데 그때는 쏟아지는 비였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비 올 대비까지 하긴 했는데 모르죠. 5월에도 비가 좀 있잖아요.”

- 지난주 ‘불후의 명곡’ 조용필 편이 시작했죠. 다들 롤모델로 꼽더라고요.
“그냥 오래 했으니까. 조금 과찬 같다는 생각도 들고. 50주년이라고 너무 띄워주는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띄울 만한 사람이 아닌데, 뭐라 그럴까 조금 부끄럽다 그럴까. 그래요. 진짜.”

- 너무 겸양지덕 아닌가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나는 그냥 음악이 좋아서 쭉 해왔던 사람인데, 하다 보니까 기록이 나오고. 기록이란 건 깨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기자간담회나 ‘불후의 명곡’ 녹화할 때 보니 이런 것도 있었나 하면서 놀라긴 했어요.”

- 조용필의 롤모델은 누굴까요.
“롤모델이라기보다 비틀스나 롤링스톤스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 곡을 만드는 게 꿈이었으니까. 나보다 선배지만 몇 살 차이는 안 나고 해서 롤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곡 능력이 참 부러웠죠. 큰 배움이 되고, 지금도 연구대상이기도 하고.”

- 공자가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군요.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죽을 때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배울 수밖에 없죠. 요즘 음악 들으면서도 내가 몰랐던 점들을 발견하고. 배우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요.”

'불후의 명곡' 녹화현장이 궁금하다면

◇자고로 공부란 끝이 없는 거야…모범생 조용필

조용필이 기자가 선물한 박노해 시인의 시집『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살펴보고 있다. 가사를 쓸 때 시집은 물론 신문 기사나 칼럼 등 다양한 유형의 글을 참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용필이 기자가 선물한 박노해 시인의 시집『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살펴보고 있다. 가사를 쓸 때 시집은 물론 신문 기사나 칼럼 등 다양한 유형의 글을 참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공부하는 걸 좋아하셨나 봐요. 안성기씨가 ‘모범생’이라고 하던데.
“그건 그냥 칭찬이 아닐까. 방에서 밤에 공부하면서도 라디오에서 팝송 프로그램만 들었는 걸요. 최동욱씨라든지, 박원웅씨라든지. 어느 날 형이 기타를 하나 갖다 놨길래 그게 인연이 됐어요. 음악 들으며 뚱땅대고, 짚어보고 하면서.”

- 본격적으로 한 건 언제부턴가요.
“기타를 처음 만진 건 중2 때, 본격적으로 친 건 고3 때부터죠.”

- 그런데 가출할 용기는 어떻게 났나요.
“가출했다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 몇 번 했는데….운명일 거예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70년도인가 형이 찾으러 와서 붙잡혀 갔는데 다시 나왔죠. 들락날락했어요.”

- 음악이 그렇게 좋았나요.
“음악이라는 게 한번 시작하면 계속되는 게, 그게 중독 아닐까요. 악기를 다루니까 아주 정말 좋은 노래를 발견하면 한 곡 한 곡 카피해서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어떤 만족감 같은 게 있잖아요. 그 만족감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 주로 팝송이었죠.
“그럼. 국내 음악은 전혀 안 들었으니까. 또 미8군 들어갔으니 그쪽 음악을 해야죠.”

- 혹시 가족 중에 음악 하는 분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부모님이나 직계가족이나 친척 중에도 없더라고요. 저도 궁금해서 한 번 여쭤봤거든요.”

- 처음엔 부모님 속도 많이 썩였겠어요.
“제가 7남매 중 여섯 째인데 처음엔 엄청 싫어했죠. 아들이 딴따라 하는데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그때는 머리 길고 기타 치면 동네에서 다 불량배 같은 놈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히트 치고 나서는 제가 부모님을 모셨어요.”

- 그것 또한 운명일까요.
“그럼요. 운명이죠. 대역부터 시작했잖아요. 우리 베이스기타가 갑자기 군대 영장이 나와서 3일 만에 들어가야 하니까 밤새 레퍼토리 외우고 해서 간신히 무대에 섰죠. 그때 그 친구가 노래 60~70%를 하고, 나머지는 세컨드 기타가 하고, 전 기타만 칠 때였는데.”

- 운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시나 봐요.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까 운이 좋았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히트의 3대 요소에도 운이 꼭 들어가더라고요. 운이 있어야 하고, 시기를 잘 타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고. 맞는 얘기 같아요.”

◇내 사전에 시련이란 없다…운명론자 조용필

2013년 19집을 발표하며 재정비한 작업 공간은 '위대한 탄생' 멤버들과 함께 연습하는 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선희, 정인, 최진희 등도 이곳에 모여 평양공연을 준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3년 19집을 발표하며 재정비한 작업 공간은 '위대한 탄생' 멤버들과 함께 연습하는 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선희, 정인, 최진희 등도 이곳에 모여 평양공연을 준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80년 1집이 나오기 전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요.
“정확히 2년 7개월인데 그 시기에 곡을 많이 만들었어요. ‘창밖의 여자’도 만들고, ‘단발머리’도 만들고. 그때는 참 다양한 음악이 히트하던 때거든요. 이탈리아 칸초네, 프랑스 샹송, 라틴 음악도 있고, 미국 솔(soul)이나 록도 있고 그런 음악을 접하다 보니까 도움이 많이 됐죠. 한국음악은 트로트가 많았는데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비트 있는 노래를 하니까 히트가 됐죠.”

- 한국음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TBC에서 다큐 같은 걸 틀어줬는데 조그만 나룻배에 사공이 노를 젓고 소복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면서 ‘한오백년’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에 저런 음악이 있구나. 그래서 레코드점 가서 하나 얻어들었는데 그거 가지곤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한오백년’ 음반만 9~10개 찾아서 다 사서 들어봤어요. 그런데 건반에다 얹어보니 음계가 안 맞아서 양악으로 맞게끔 부른 게 ‘한오백년’이에요. 그걸 발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서도 민요, 남도 창, 흥부전 판소리까지 찾아봤죠.”

- 정식으로 소리를 배운 건가요.
“거의 흉내예요. 정식으로 사사 받은 건 없고, 흉내를 내다 보니 조용필 창법 같은 게 된 거죠. 국악의 특이한 묘미가 여기 있구나 싶어서 꽹과리도 쳐보고 사물놀이도 해보고 조상현씨, 김정수씨 같은 명창도 따라 다녔어요. 이건 뭐여 하면서 사투리도 좀 배우고.”

- 그 전까진 미성이었죠. 탁성을 배우면서 피를 흘렸단 말도 있던데.
“에이 그건 거짓말이에요. 피 토하면 찢어진 건데 그럼 목소리 버리는 거죠. 그건 아니고 연습은 많이 했어요. 탁성이라는 게 가래 끓는 소리를 해야 하잖아요. 남자 목소리를 여자 키로 올리려니까. 미성으론 못 올라가요. 그래서 판소리 창법을 통해서 목소리에 변화를 많이 가져온 거죠. 처음엔 탁성으로 ‘꿈’을 부르니까 ‘조용필 목소리 완전히 가버렸네’ 그런 얘길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 흉내 낸다고 다 되진 않을 텐데요.
“창조는 모방에서 나온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저도 모방에서부터 시작했는 걸요. 처음부터 똑같이 흉내 내려고 시작했는데 그럴 순 없으니까. 그거보다 더 잘하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작곡하면 그게 내 스타일이 될 거고. 다른 사람들이 내 노래를 부르게 되면 내 흉내를 낼 수밖에 없잖아요. 흉내 내다 발전하고, 흉내 내다 발전하고 하는 거죠. 왜 전화기도 그렇잖아요. 조그만 휴대폰에서 시작해서 노트까지 나오고.”

- 그 시절이 굉장히 소중했겠어요. 남들이 보기엔 시련일 수도 있는데.
“난 시련이라고 생각은 안 해요. 그때 마침 그런 시기가 왔기 때문에 가요 쪽으로도, 민요 쪽으로도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거지. 음악을 아예 못하게 했으면 정말 크나큰 시련일 수도 있고, 내가 머리를 아예 다른 쪽으로 돌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음악을 할 수 있었잖아요.”

50주년 기자간담회 현장이 궁금하다면

◇나는 모방한다, 고로 창조한다…진화론자 조용필

지난 11일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조용필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 LP부터 테이프, CD, 음원까지 다양한 형태로 음악을 발표한 음악 인생을 기리기 위해 LP카페 콘셉트로 꾸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1일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조용필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 LP부터 테이프, CD, 음원까지 다양한 형태로 음악을 발표한 음악 인생을 기리기 위해 LP카페 콘셉트로 꾸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선생님이 생각하는 가수는 어떤 사람인가요.
“음악이라는 게 뭐겠어요.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갈래로 표현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랑, 슬픔, 기쁨, 외로움, 그리움에 대한 걸 노래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1940~50년대 미국 같으면 전쟁하지 말자 이런 얘기도 하고, 요즘 같으면 랩을 통해서 사회풍자도 하고. 나는 동심에 대해서도 노래했고, 사랑의 슬픔이나 우정에 대한 노래도 했죠.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니까 ‘서울 서울 서울’ 같은 것도 만들어 보고, 한강에 관한 노래도 꼭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한강’도 만든 건데. 그중 어느 갈래에 속하려나. 그건 대중이 더 잘 알겠죠.”

- ‘서울 1987년’도 그렇게 나온 건가요.
“그건 TV를 보다가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 싶어서 만든 거예요. 6월 항쟁을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이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양어머니이신 전옥숙 여사한테 제가 곡을 쓸 테니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죠.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생명’도 그렇고.”

- 전옥숙 여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영화제작자이자 홍상수 감독 어머니시죠.
“80년 무렵 그냥 여러 사람 모이는 가운데서 만났는데, 날 아들처럼 생각했는지 ‘엄마라고 불러’ 그러더라고요. 저한테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해 주셨어요. 생각이 깊은 분이었죠. 술도 잘 드시고.”

- 음악가 중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을 꼽을 수 있을까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김희갑 선생님과도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글쎄 워낙 많아서, 한두 분을 꼽기는 힘들죠. 김희갑 선생님은 멜로디를 정말 아름답게 쓰는 분이죠. 저하고는 음악적으로 가는 길이 조금 다르지만. 저는 젊었을 때 워낙 팝, 록을 많이 들었던 사람이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노래할래요…아이돌 조용필

50년간 음악을 해온 비결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말한 조용필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후배 가수 의 무대를 볼 때도, 동료의 인터뷰 영상을 볼 때도 그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0년간 음악을 해온 비결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말한 조용필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후배 가수 의 무대를 볼 때도, 동료의 인터뷰 영상을 볼 때도 그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50주년 공연 때 신곡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안나와요. 작년 12월에 이미 접었으니까.”

- 내년에 새 앨범을 만날 수 있을까요. 2008년에도 곧 19집 발매 예정이라고 했는데 2013년에 나왔잖아요.
“하하. 그게 잘 안 돼요. 그럴 목적으로 하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또 파기하고 없애 버리고 하니까. 지금은 이미 몇 곡 나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수월할 것 같아요.”

-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으시죠.
“없어요. 진짜로. 처음엔 항상 옆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힘들었죠. 그런데 혼자 오래 살아서 이젠 괜찮아요.”

- 그래도 참 건강하세요.
“일주일에 PT를 2번은 받아요. 그것도 중독이어서 PT 안 하는 날도 집에서 20~30분이라도 꼭 해요. 한 4년 하다 보니까 프로그램을 쭉 외워서. 골프도 작년까진 쳤는데 올해는 바빠서 못했어요.”

- 운동도 연습광이군요.
“운동도 안 하다 하면 여기저기 땡기고 하잖아요. 목소리도 자꾸 써줘야 돼요. 안 쓰면 녹슬어요. 그런데 매일 하면 땡기는 게 없죠. 목이 쉬거나 칼칼하다든지 하는 것도 없고. 매일 정식 연습은 못 해요. 음악은 하루도 안 빠지고 들으니까 같이 목 푸는 수준이지.”

- 인생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꼽자면요.
“글쎄요. 굳이 얘기한다면 초등학교 시절 정도 되지 않을까요. 10살 미만이 흡수력이 제일 빠르잖아요. 나이 먹으면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이 다음에 내 또래 되면 알 거예요.”

-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나 당부가 있다면.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시스템이 좋아져서 가수 혼자 다 하는 시대는 끝났어요. 기획사 차원에서 움직이는 건데 내가 감히 얘기할 수가 없죠. 아이돌 같은 경우는 사람도 많잖아요. 지난번에 세븐틴 보니까 13명이던데.”

- 요즘 태어났으면 조용필도 아이돌이었겠죠.
“에이 난 아이돌은 안 할 것 같아요. 아이돌 하면 춤춰야 되잖아요. 나는 그냥 밥 딜런이나 에드 시런처럼 통기타 하나 가지고 혼자 노래할래요.”

노래방에서 가왕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박정호·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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