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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대높은 도쿄 오페라 청중 제압한 소프라노 임세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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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아이다로 7회 공연한 소프라노 임세경.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아이다로 7회 공연한 소프라노 임세경.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도쿄의 신국립극장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신국립극장은 풍부한 레퍼토리와 정상급 아티스트들의 완성도 높은 오페라 공연으로 도쿄 청중과 함께 차곡차곡 역사를 쌓아왔다. 청중들은 매회 만석을 채우는 것으로 신국립극장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보여줬고, 극장은 3년 전부터 아티스트와 프로덕션을 섭외하는 치밀한 운영으로 부응해왔다. 이러한 신국립극장이 20년을 기념해 오페라 연출의 '살아 있는 전설' 프랑코 제피렐리(95)가 제작한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를 다시 한번 무대에 올렸다.

도쿄 신국립극장 오페라 '아이다' 리뷰

일본 음악계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이벤트에 누가 주역을 맡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놀랍게도 주인공은 한국의 소프라노 임세경이었다. 자존심이 센 일본의 오페라 청중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임세경은 무려 단독 캐스팅으로 이달 초부터 총 7회 공연을 해 오며 도쿄 청중으로부터 새로운 아이다의 탄생을 축하받았다.

임세경은 현재 베로나 야외 오페라와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를 비롯해 빈 슈타츠오퍼의 첫 한국인 타이틀 롤 소프라노로서 주가를 올리고 있다. 2015년 베로나 페스티벌에선 한국인 최초로 주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의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인 ‘팔리아치/외투’ 무대에서 잔인할 정도의 스핀토(극적인 창법)를 보여줬고 이탈리아의 드라마틱 소프라노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쿄 신국립극장의 20주년 무대 '아이다'.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도쿄 신국립극장의 20주년 무대 '아이다'.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임세경은 여섯 번째 무대였던 20일 ‘아이다’에서 놀라운 목소리를 바탕으로 더욱 강렬한 에너지와 카리스마를 발산해 청중을 제압해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이다에 새로운 성격을 불어넣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압도하는 성량과 옛 가수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종을 울리는 듯한 톤이 그의 무기였다. 그 결과 아이다의 최고 배역으로 손꼽혔던 마리아 굴레기나나 젊은 아이다로 주목받는 크리스틴 루이스의 가창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몰입감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1막의 유명한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부터 임세경의 거침없는 가창은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3막 아리아 ‘오 나의 고향이여’에서는 한 호흡으로 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는 메사 디 보체를 절묘하게 발휘해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자연스러운 호흡 위에 소리를 얹는 술 피아토는 한없이 신비로웠다. 신파적인 호소력과는 차원이 다른 색다른 감흥을 자아냈다.

4막 지하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라다메스와 부르는 사랑의 2중창에서도 포르티시모(가장 큰 소리)에 버금가는 에너지와 전달력을 실은 피아니시모(가장 작은 소리)를 구가했다. 또 3막부터 목이 풀리며 좋은 음색과 영웅적인 목소리를 선보인 테너 나즈미딘 마빌야노프와 함께 벨칸토의 황금시대를 연상케 하는 감동적인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이번 무대를 통해 임세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연기를 노래하듯, 노래를 연기를 하듯, 그는 베르디 비극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와 연기의 혼연일체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대형 가수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특히 2막에서 현존 최고의 암네리스로 손꼽히는 메조 소프라노 예키테리나 세멘축과의 여성 대결 장면에서 시녀로서의 태도부터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사랑의 여전사로서의 모습까지 변화무쌍하게 보여줬다. 놀라운 연기력이다.

'아이다'의 두 주역 라다메스역을 맡은 테너 나즈미딘 마빌야노프와 아이다 역의 소프라노 임세경.(오른쪽)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아이다'의 두 주역 라다메스역을 맡은 테너 나즈미딘 마빌야노프와 아이다 역의 소프라노 임세경.(오른쪽) [사진 신국립극장 데라시 마사히코 데라시]

3막에 등장하는 아버지와의 2중창에서 그녀는 조국과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심경을 설득력 높게 펼쳐내 객석으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끌어냈다. 이 대목에서 홀을 진동시킨 그 날카롭되 슬픔이 배어나는 탄식의 음조는 잊히기 어려운 감동으로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공연이 끝난 뒤 출연자 출입구에 사인을 받으러 몰려든 현지 팬들의 모습을 보며 임세경의 시대가 이제 시작되었음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국립극장은 개선 장면에 300명이 넘게 나오는 제피렐리의 ‘아이다’를 개관 5ㆍ10ㆍ15년에도 공연했다. 자연주의적 스타일과 극사실주의적 연출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고유의 정서와 정묘한 캐릭터,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줬던 제피렐리. 그는 ‘투란도트’ ‘카르멘’ ‘라 보엠’과 더불어 ‘아이다’ 프로덕션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출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제피렐리는 끊임없이 ‘아이다’ 무대를 발전시켰는데, 가장 최근에 제작된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프로덕션까지를 일별해 보면 디테일과 스케일이 달라졌을 뿐 근본적인 구도는 1962년 프로덕션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도쿄 무대에서는 개선 장면에서 화려한 전리품보다는 병사들의 기나긴 행진으로 시대적인 현실감을 담백하게 강조했다. 여기에 실제 백마 두 마리까지 등장해 무대의 사실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살아 있는 거장 제피렐리와 신국립극장의 장인 기질이 만난 신국립극장 20주년 무대는 임세경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확인하며 23일 막을 내렸다.

도쿄=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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