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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움 절실한 김정은, 협상 ‘밤샘 밀당’ 대신 일사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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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D-4 변한 북한, 변하지 않은 북한

지난 1월 9일 오전 10시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선권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을 수석대표로 한 남북 고위급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첫 고위급 회담으로, 북측 대표단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 등 세 가지를 합의했는데도 1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열린 고위급 회담(지난달 29일)이나 예술단 교환 실무회담 등 대부분 회담도 점심시간 직후나 저녁 시간 전에 끝났다. 밤새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도 합의에 실패하곤 했던 과거 회담과는 딴판이다. 회담은 올해 들어 모두 합의를 끌어냈다. 조명균 장관은 1월 회담 후 “이선권 위원장과 대화할 만하더라”며 “이 위원장이 ‘다른 때처럼 군복을 입고 나왔으면 책상을 박차고 나갔을지 모르겠는데 양복이라 오늘은 좀 다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선권은 과거 남북 장성급 회담 당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함께 군복을 입고 나와 거친 입담을 과시했다. 군사회담에서 대결과 기싸움 전문이었던 그가 요즘 민간의 전문 회담 일꾼보다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대남 관계 개선에 매달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여기엔 한국의 북·미 간 중재역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다고 한다.

④ 결국은 남북관계 통해야 산다

4·27 남북 정상회담 관련 발언

4·27 남북 정상회담 관련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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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과거엔 남측에 양보한 대표 처벌 

북한은 지난달 31일 평양을 방문한 남측 예술단도 환대했다. 통상 남북 당국 간 행사의 경우 숙박비나 식사 등은 초청자 부담이 원칙이다. 하지만 북측은 이번에 사우나와 안마실 등 호텔 부대 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전언이다. 과거 민간 행사의 경우 북측 환영 만찬 비용까지 남측 주관 행사로 돌리기도 했고, 편의 시설 제공도 최소화했다.

이런 변화는 북한의 내부 검열과도 정반대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후계자 시절이던 2010년 통일전선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총화)을 진행했다고 한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당시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때 남측과 진행한 회담에서 남측 주장을 수용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며 “북한식 대남 부문 ‘적폐청산’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00년 이후 진행한 남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 등 남측에 양보한 내용과 일정을 일일이 찾아내 회담 관계자들을 상대로 해명을 듣고 석연치 않은 양보를 했다고 판단한 상당수 인사를 반당 행위로 처벌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북한이 지금 회담 일정이나 장소에 대해선 남측 제안을 거의 수용하고 있다. 27일 열릴 예정인 남북 정상회담 장소도 김정은 스스로 판문점 남측 지역(평화의집)을 선택했다고 한다.

김정은 ‘핵 완성’ 선언 뒤 확 바뀌어 

북한의 대남 정책 변화의 전환점은 1월 1일 김정은의 신년사다. 지난해 말까지 북한은 군사 당국 회담이나 적십자 회담 등 한국 정부의 잇따른 회담 제안에 묵묵부답이었다. 김정은은 “동결 상태에 있는 북남(남북) 관계를 개선하여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북한 당국자들을 접촉했던 정부 관계자는 “그들도 김 위원장의 계산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임신 중인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특사로 서울에 보내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은 파격이다. 2000년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남측 제의와 설득으로 열렸다. 평창 겨울올림픽 때 방한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등 북한 대표단을 두고는 “그 이상 고위급을 꾸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만능의 보검으로 협상 대상이 아니라던 핵무기 문제를 두고 남측과 논의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북한은 2002년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이래 핵 문제는 북·미 간 현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코리아 패싱을 해 왔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18일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북한이 이전에는 한국이나 주변국 요구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로 나왔지만 이번에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나온 측면이 있어 (남북 정상회담 등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평양 간 예술단 “호텔 안마도 공짜” 

북한의 변화는 지난해 말 핵 무력 완성 선언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20년 넘게 후계자 지위에서 활동한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게 급선무였다”며 “김정은은 아버지가 개발하던 핵을 완성해 유훈을 이행하고, 체제 보위에 대한 자신감을 대내적으로 확보한 뒤 몸값이 가장 높은 지금 황금 도끼(핵)를 담보로 협상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혈맹인 중국마저 등을 돌리면서 경제난과 함께 외교적 고립이 깊어지자 한국에서 퇴로와 활로를 동시에 찾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에 숨통을 틔우면서 군사적 옵션도 검토 중인 미국과의 협상에서 남한을 완충재로 활용하는 전략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문제는 김정은에겐 선대의 유훈 관철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협상이 녹록지 않고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국은  안전판일 수도 있다. 김정은이 지난달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관계 복원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이 최근 전략 국가 등 ‘전략’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며 “여기엔 한국과 중국을 염두에 둔 지정학적인 의미도 포함돼 있어 적극 활용하겠다는 취지”라고 분석했다.

북·미 협상 때 한국 지원 바란 듯

북한의 대남 관계 개선 드라이브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디딤돌로 국제사회로 나가는 토대를 마련한 뒤 추가 남북 정상회담이나 후속 협상을 통해 남북관계를 관리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이 생애 마지막에 서명한 문건이 남북관계와 관련한 것이고, 통일 문제가 김정일의 유훈이라고 북한은 주장한다. 이를 고려하면 김정은도 남북관계 개선을 유훈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관계가 개선되더라도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발전을 위해 유엔 대북제재 완화와 함께 한국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① 김정은의 선택, 왜 바깥으로 나왔나

② 삼시세끼 해결 목표 대북제재가 발목 잡다
③ 아버지 사람들이 없다
④ 결국은 남북관계 통해야 산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정용수 기자 jeong.yo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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