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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3세 빅토르 최가 겪은 고독감, 제 것 같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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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일 오후 중앙일보 스튜디오에 온 배우 유태오. 러시아 영화 <레토>에서 빅토르 최 역으로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다.

19일 오후 중앙일보 스튜디오에 온 배우 유태오. 러시아 영화 <레토>에서 빅토르 최 역으로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다.

요절한 전설적인 록가수 빅토르 최(1962~1990)의 데뷔 초기를 조명한 러시아 영화 ‘레토(Leto·여름)’가 다음 달 열리는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과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겨루게 됐다.

칸 가는 영화 ‘레토’ 주인공 유태오 #파독 광부·간호사 부모 둔 독일생 #3주만에 러시아어 대사와 노래 소화

고려인 3세인 빅토르 최는 훗날 옛 소련 붕괴의 요인으로 지목될 만큼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된 러시아 국민 영웅. 이 역할을 위한 오디션엔 전 세계 2000여명의 배우가 몰렸다. 연출을 맡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낙점한 주인공은 낯선 한국배우 유태오(37·사진)다. 20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그는 “(오랜 무명 시절로) 많이 힘들고, 지쳤을 때 ‘레토’를 만났다”면서 “첫 주연작으로 칸에 간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난다”고 말했다.

유태오는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광부,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한때 농구선수를 꿈꿨지만 무릎부상 후 영화에 눈을 돌렸다. 뉴욕, 런던에서 연기 공부를 했고 10여 년 전 뉴욕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2009년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뉴욕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한국에 왔다”고 소개한 앳된 청년이 그다. 이후 신선한 얼굴로 주목받았지만 ‘러브픽션’ ‘자칼이 온다’ ‘일대일’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등의 영화 단역에 그쳤다.

독일어·영어에 능한 그에게 돌파구가 돼준 게 3년 전 미국 SF 영화 ‘이퀄스’로 물꼬를 튼 해외 진출이다. 한국계 미국 감독 벤슨 리가 1980년대 재외 청소년들의 서울 체험기를 그린 영화 ‘서울 서칭’으론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 받았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태국 영화 등에도 출연했다. ‘레토’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 4월 친한 고려인 영화감독을 통해서다. 자작곡 연주 영상을 러시아 제작사에 보냈다. 모스크바행 비행기 티켓과 함께 오디션을 보러 오란 전갈이 돌아왔다. 4시간에 걸친 모스크바 현지 오디션의 결과는 합격통보였다.

빅토르 최

빅토르 최

“‘레토’는 빅토르 최가 첫 앨범을 내던 열아홉, 스무살 때 얘기에요. 그는 야성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저는 그가 쓴 가사에서 시적이고 쓸쓸한 감성을 느꼈어요. (러시아·고려인 혼혈인) 빅토르 최가 겪은 고독감, 공허함이 제 것 같았죠. 감독님이 제 해석을 좋게 봐주셨어요.”

지난해 여름 촬영까지 단 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러시아어 대사와 노래 9곡을 완벽히 익혀야 했다. 촬영 둘째 날엔 450명 관중 앞에 공연을 했다. 생전 영상과 언론 보도 등을 샅샅이 뒤져 턱을 꼿꼿이 들고 노래했던 특유의 제스처까지 소화했다.

‘레토’는 반정부적 성향으로 푸틴 정부에 눈총 받던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촬영 막바지 ‘공금 횡령’을 혐의로 가택 연금되며 난항을 겪었다. 동료들 도움으로 영화는 간신히 완성됐다. 유태오는 “미행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처음 겪었다”면서 “그럴수록 오로지 빅토르 최를 더 잘해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요즘 마블 만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는 그는 기회만 된다면 차세대 헐크로 지목된 한국인 캐릭터 ‘아마데우스 조’ 역할을 연기 해보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뭔가 잘될 것 같다가 다시 배고파진 적이 많아서 이젠 김칫국은 안 먹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배우로 꼭 인정받고 싶어요. 제가 힘들었던 경험을 잘 쌓아뒀다가 언젠가 아시아 배우의 해외 진출을 돕는 기관을 만드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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