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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기울어진 운동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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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조현숙 경제부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미국의 대형 상업은행 웰스파고가 10억 달러(약 1조700억원)의 벌금을 맞는다.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CFPB)과 통화감독청(OCC)이 지난 20일 발표한 조치다. 자동차 대출을 받은 사람에게 자동차보험을 강매하고, 주택담보 대출자에게 부당하게 추가 수수료를 물렸다는 이유다.

웰스파고는 고객 동의를 받지 않고 수백만 개의 ‘유령 계좌’를 만들고, 차량 대출을 받은 군인의 자동차를 불법으로 회수했다. 이 일로 미국 법무부와 주 정부는 웰스파고에 15억 달러 가까운 벌금을 부과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웰스파고에 총자산 동결, 이사진 교체 조치를 내렸다. 웰스파고는 올해 1분기 벌어들인 이익(59억 달러)의 대부분을 소송 비용과 벌금 납부에 써야 할 처지다.

고객을 기만한 금융사가 대규모 벌금과 함께 이중삼중의 제재를 받는 건 미국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자산 규모 3위의 대형은행(웰스파고)에서 벌어진 일이라 화제가 됐을 뿐이다.

지난 6일 벌어진 삼성증권 ‘유령 주식’ 사태로 주식시장이 들끓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개인 투자자의 불만이 많았다. 공매도만의 얘기는 아니다. 개인은 계좌에 없는 주식을 단 한 주라도 만들 수도, 팔 수도 없다. 삼성증권은 클릭 한 번으로 28억 주라는 막대한 주식을 창조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개인은 위조지폐를 만들면 최대 무기징역에 처한다. 삼성증권은 사실상 위조주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금융사의 제재 규정상(시장질서 교란 행위 기준) 최대 과징금이라고 해봤자 5억원 또는 손실액의 1.5배다. 수조원 벌금은 먼 나라 얘기다.

미국 같은 선진국 금융시장에도 탐욕이 문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을 투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게임의 룰’이 공평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규정을 지키는 범위에선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지만, 규정을 어겼다면 강력한 제재를 받는다. 초대형 금융사든, 개인 투자자든 마찬가지다.

한국의 자본시장법은 제1조에서 공정한 경쟁 촉진과 함께 공정성·신뢰성을 내세운다. 하지만 현실은 개발경제 시대의 금융진흥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선진국 금융시장이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은 공정한 게임의 룰이다. 삼성증권 사태를 계기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개인 투자자의 목소리를 흘려 들어선 안 된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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