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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시장 개입 내역, 분기별·순매수 공개로 가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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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1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면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1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면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환율 주권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던 외환시장 개입 공개 방안이 서서히 윤곽을 갖추는 모양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3개월 단위로 외환 순매수 내용만 공개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동연, G20 회의서 방침 설명 #점진적으로 밝히는 게 큰 방향 #먼저 순매수 내용 공개부터 검토 #추후 매수·매도 규모까지 확대 #“투기세력 공격 받을 가능성도”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김 부총리는 21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우리처럼 성숙한 경제와 외환시장을 가진 나라는 외환시장 개입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며 “점진적으로 하면서 우리 시장에 연착륙할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김 부총리는 이어 “외환시장 개입 내용 공개는 각국이 사정에 맞게 일·월·분기 단위로 하고 있고, 아주 드물게 6개월 단위도 있다. 시장이 잘 적응하는 방향이라면 공개 주기를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종합하면 한국 외환당국은 6개월 단위가 아닌 3개월 단위의 공개 형태를 취할 가능성이 크고, 순매수 내용 공개부터 한 뒤 순차적으로 매수·매도 총액 공개로 전환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달 외환시장 개입 공개 이슈가 논란이 됐을 때부터 공개 자체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외환시장 개입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데다가 미국의 공개 압박도 갈수록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논의의 초점은 공개 주기와 범위에 모아졌다. 기준이 없는 건 아니다. 2015년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 시 작성된 ‘TPP 회원국 거시정책당국의 공동선언’이 있다. 공동선언에는 회원국들이 외환시장 개입 상황에 대해 분기별(3개월)로 매수·매도 총액을 공개해야 한다는 합의가 포함돼 있다. 다만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는 다른 회원국과 달리 6개월 단위로 순매수 내용만 공개해도 된다는 예외를 인정받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TPP는 미국을 제외한 11개국으로 출범했지만 미국이 뒤늦게 다시 가입 의사를 밝히면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형태로 조직을 확대할 분위기다. 한국도 CPTPP 가입을 추진 중이라 여러 측면에서 이 공동선언 내용을 참고해야 할 상황이다.

한국 정부의 목표도 예외를 인정받은 3개국 수준의 공개, 즉 6개월 단위의 순매수 내용 공개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6개월 단위의 공개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았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5년과 같은 예외를 인정할 가능성은 작다. 한국이 경제 규모가 다른 베트남 등 3개국과는 같은 특혜를 받는다는 것도 좋다고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다만 순매수 내용 공개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순매수 내용 공개는 당국이 외환을 사고판 내용을 일일이 공개하지 않고 최종 결과물만 공개하는 형태다. 예를 들어 매수, 매도 금액이 각각 100원일 경우 순매수액 0원만 공개하면 된다. 반대로 매수·매도 총액 공개는 사고판 내용을 일일이 공개해야 하므로 당국 입장에서는 개입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순매수 내용 공개 형태의 외환시장 공개 개입이 TPP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김 부총리는 “IMF나 미국, G20 등과 대화도 하고 요구도 받지만 분명한 것은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TPP 규정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일단 순매수 내용 공개부터 한 뒤 CPTPP 가입 시점 등 다음에 매수·매도 총액 공개로 전환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아직 최종 공개 방안이 확정된 건 아니다. 하지만 김 부총리가 19일(현지시간)부터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 등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공개를 촉구한 인물들과 연쇄 면담한 뒤 이런 발언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3개월 단위, 순매수 내용 공개 형태로 틀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4월에는 발표하지 않을 것”이라는 김 부총리 발언 역시 남북정상회담을 고려해 발표만 5월로 미룬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시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외환 시장 개입 규모 등을 공개하면 원화 강세 가속 가능성과 투기세력 악용 가능성도 커진다. 정규돈 국제금융센터장은 “한국은 수출입 비중이 크고, 경제 개방성도 높다”며 “정부의 개입 규모와 전략을 자세히 공개하면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환이 많이 유입돼 원화 가치가 급속도로 상승하는 경우, 즉 환율이 적정환율에서 괴리됐을 때도 개입할 수 있도록 IMF나 미국 등과 협의해야 한다”며 “이럴 때 개입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외환위기 발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경상수지 흑자 때 한국은행이 외환을 살 수 없게 되면 원화 가치가 급상승해 수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며 “섣부른 외환시장 개입 공개는 실정(失政)이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외환시장 개입 공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원화 가치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4분기까지만 해도 1100원대였던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는 지난 20일 달러당 1067.3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달 초에는 1050원대에 이르기도 했다. 과도한 원화 강세는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려 수출에 악영향을 미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원화가치가 1% 상승하면 수출은 0.51% 감소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우려에 대해 김 부총리는 “외환시장 개입 공개를 한다고 해도 ‘환율 결정을 전적으로 시장에 맡기되 급격한 쏠림이 있을 때 정부가 분명히 대처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박진석·심새롬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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