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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의 이나불?] 이제는 지겹다, 드라마 속 '시한부' 타령

중앙일보

입력

MBC 수목극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사진 MBC]

MBC 수목극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사진 MBC]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말씀해주세요." 19일 MBC 수목극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에서 여주인공 남현주(한혜진 분)는 주치의에게 이렇게 묻는다. 곧장 예상 가능한 대답이 등장한다. "수술하긴 늦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요. 늦었다는 건 내 판단이고." 이렇게 뇌종양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사실상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현주는 또 한 번 울컥한다. 그리고는 또 외친다. "얼마나, 얼마나 남았죠?"

데뷔 10년 이상된 윤상현과 한혜진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이 드라마의 극전 전개를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 그런데도 아, 이 식상함은 어쩔 수가 없다. 한국 드라마에서 쉽게 발견되는 고질병, 바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치병' 때문이다. 적지 않은 드라마, 특히 지상파의 드라마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소중한 가족이 꼭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 죽는다.

SBS 월화극 '키스 먼저 할까요' [사진 SBS]

SBS 월화극 '키스 먼저 할까요' [사진 SBS]

헛헛한 중년들의 감성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 호평을 받았던 SBS 월화극 '키스 먼저 할까요?'의 경우 12.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까지 올랐던 시청률이 최근 9% 초반대까지 떨어졌다. 시한부인 감우성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극이 점점 더 신파조로 가는 것과 무관치 않다.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도 극 전개가 빨라지며 최근 시청률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시청률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한부 인생이나 불치병 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 끝이 정해진 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법.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지고지순한 그 사랑은, 우리가 그렇게도 꿈꾸고 바라던 '순수한 사랑'으로 비친다. 그렇기에 시한부 인생을 통해 절절한 사랑을 표현한 명작들이 많다. 오래 전까지 거슬러가면 '가을동화'(2000), '겨울연가'(2002), '네 멋대로 해라'(2002), '천국의 계단'(2003)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로는 '편지'(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이 있다.

지난 3월 종영된 KBS2 '황금빛 내 인생'.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는 결국 암으로 죽는다. [사진 KBS2]

지난 3월 종영된 KBS2 '황금빛 내 인생'.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는 결국 암으로 죽는다. [사진 KBS2]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시청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취향 또한 바뀐지 오래다. 20년 전부터 단골처럼 등장하던 시한부, 불치병을 통해 그리는 로맨스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시청자들이 외면하든 말든 비슷한 소재를 반복하며 '쉽게' 로맨스를 그리는 건 시청자를 무시하는 행위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지상파는 드라마 소재나 형식적 시도의 무난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불치병' 만큼이나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이었던 '기억상실' 소재와 '신데렐라' 내러티브는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일부 판타지 멜로극이나 사극에만 존재한다. 지난해 중순 인기를 끌었던 KBS2 '쌈, 마이웨이'에서 여주인공 애라(김지원 분)가 했던 대사 "백마 태워 호강시켜주길 바라는 여자들이 세상에 널렸을 거 같은가본데 그 신데렐라 기지배는 이젠 드라마에서도 안 먹혀요"는 아직까지도 명대사로 회자된다.

식상한 소재, 특히 지상파에서 반복

그나마 '키스 먼저 할까요?'는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무한은 스위스의 한 병원에 존엄사를 신청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순진은 무한을 병원에 입원시키려하고 무한은 이에 따르면서도 "나한테는 어떻게 살까가 어떻게 죽을까"라면서 자신의 '존엄'에 대해 누차 얘기한다. 이는 그간 불치병 소재를 시청자 울리는 신파의 소재로만 활용했던 것과 결이 다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고통과 아픔이 내재된 불치병이란 소재는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라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보편적 소재를 진부하게 답습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행위가 없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담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상한 소재의 반복은 특히 지상파 방송에서 자주 등장한다. 넓은 시청층을 고려해야 하는 한계와, 일부 우수 제작진의 유료 채널로의 이동, '대박은 못쳐도 망하진 말자'는 보신주의, 수차례 결재라인을 거쳐야 하는 딱딱한 의사 결정 구조 등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모든 사정을 고려한다 해도 지상파의 드라마는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영역에 있어서 지상파는 더 이상 유료 채널의 '도전'을 막아내야 하는 1등의 위치에 있지 않다. 유료 채널의 활약에 이제라도 좇아가야 하는 상황이란 사실부터 지상파는 깨달아야 한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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