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편집국장레터] 文 대통령의 515자 입장문

중앙선데이

입력 2018.04.13 17:53

업데이트 2018.04.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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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호 면

글을 쓰는 직업이라 글에 의미를 둘 때가 많습니다. 오늘 그랬습니다. ‘대통령의 입장문’ 얘깁니다. 11개 문장, 515자에 불과했지만 그 속엔 많은 게 담겨 있었습니다. 곤혹스러움과 단호함이 섞여 담겼습니다. 인사권자로서의 고민도 털어놓았습니다. 마치 김기식이라는 피고인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진 변호사의 최후진술 같았습니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12일 오후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외유성 해외출장 의혹과 관련해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12일 오후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외유성 해외출장 의혹과 관련해 발표하고 있다.

VVIP독자 여러분, 중앙SUNDAY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둘러싼 논란에 문재인 대통령이 글로 뛰어 들었습니다. 신임 금감원장을 임명한 지 꼭 1주일째 되는 13일 아침이었습니다. 입장문은 정교했습니다. ‘위법이라는 객관적인 판정’, ‘관행에 비추어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라는 판단’이 김기식을 사임시키는 조건이었습니다.

곤혹스러움과 단호함, 고민까지
변호사 최후진술 같았던
문재인 대통령 515자 입장문

'위법이라는 객관적인 판정'은 압수수색으로 수사를 시작한 검찰, 청와대 질의서를 받아든 중앙선관위의 몫이 됐습니다. 해외출장 건은 관행의 영역인 반면, 후원금 건에 대해선 상황이 심각합니다. 쓰다 남으면 당연히 국고에 귀속시켜야할 후원금을 더미래연구소에 기부하고, 국회의원 임기 후 해당 연구소의 소장이 돼 활동비 형태로 돈을 받은 사실은 변칙과 편법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관행에 비추어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라고 한 대목은 모호합니다. 평균 이하의 기준은 뭐고, 판단의 주체는 누군지가 없습니다. 그래선지 해석이 구구합니다. 버티기라는 설명에서부터 사퇴 수순이라는 얘기까지.
결론적으로 주말을 거치면서 생겨날 여론이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입장문에도 그런 표현들이 들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판단에 따라야 하겠지만, 위법한지, 당시 관행이었는지에 대해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한병도 정무수석이 13일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영수회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병도 정무수석이 13일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영수회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기식의 거취보다 눈길을 끄는 건 ‘인사 때마다 하게 되는 (대통령의)고민’이라는 부분입니다. 입장문에 담긴 고민은 이랬습니다.
“논란을 피하는 무난한 선택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해당 분야의 관료 출신 등을 임명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과감한 선택일수록 비판과 저항이 두렵습니다. 늘 고민입니다.”
금감원장에 김기식을 임명한 건 대통령 표현대로라면 ‘과감한 선택’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모아보면 김기식에 대한 대통령의 평가는 바깥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라고 합니다. 2012년 안철수 당시 대선후보측과 후보 단일화 룰 협상을 할 때 문재인 후보측 3인의 협상팀 중 한 명이 김기식이었습니다. 다른 두 명은 박영선과 윤호중이었습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6개월 밖에 안된 초선의 김기식이 가장 중요한 후보 단일화 협상팀에 포함됐던 겁니다. 당시 김기식은 ‘과감한 선택’에 부응해 좌충우돌하며 활약했습니다.

금융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통령은 이번에 김기식을 선택하며 그런 모습들을 그렸을 수 있습니다. 김기식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셀수록 금융개혁의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알고있는 김기식과, 반대하는 여론이 보는 김기식 간에는 점점 간극이 커져 갔습니다. 반대 여론 중에는 여당의원들의 주장처럼 무조건적인 적의(敵意)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지대의 여론이 변해갔다는 점입니다. 여론이 만들어간 김기식은 대통령이 알고있는 김기식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심지어 정의당과 참여연대조차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데는 피인사권자의 흠결도 흠결이지만 ‘비판과 저항이 따를 과감한 선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도 한몫 했습니다. 왜 꼭 김기식이어야만 하느냐를 놓고 특정 기업 손보기 등의 흉흉한 소문만 SNS 상에 떠돌았습니다. 그 결과가 ‘사퇴 지지 50.5% vs 반대 33.4%’(리얼미터 12일), ‘사퇴해야 49.8% vs 사퇴 반대 32.4%’(알앤씨) 등입니다. 결과론이지만 여론 관리에 실패한 겁니다.

대통령의 입장문에는 눈에 거슬리는 사족도 들어 있었습니다.
‘논란을 피하는 무난한 선택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해당분야의 관료 출신 등을 임명하는 것입니다’란 대목입니다. 이 글을 본 관료나 관료출신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과감한 선택’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쓴 입장문에는 역설적으로 ‘무난한 선택’으로 집단화된 관료 출신들의 자괴감이 배려되지 않았습니다. 꼭 이 문장이 필요했었는지 의문입니다. 적폐 청산의 흐름 속에서 가뜩이나 움츠러든 관료 사회에 이날 대통령의 입장문은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 갔을 겁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한 입장문이어서 사족은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 전자발찌의 실태를 스페셜리포트로 다뤘습니다. 성범죄 방지용으로 도입된 전자발찌 제도가 너무 허술해 엄마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USKI(한미연구소) 파문은 연구소 폐쇄로 결론났지만 워싱턴의 지한파들을 실망시켰다는 소식이 체증처럼 무겁습니다. 이렇게 거칠게 다룰 수 밖에 없었을까요. USKI 파문이 남긴 후유증도 다뤘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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