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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 10년이 넘어도 왜 영어를 못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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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주호석의 이민스토리(7)

A 씨 가족은 기러기 가족이 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딸과 함께 캐나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가장이 캐나다에 있는 가족을 방문해 부부가 유럽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랜 기러기 생활에 지쳐있던 가장이 부인과 오붓한 여행을 통해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캐나다를 떠나 첫 기착지가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그런데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행 기분을 잡치고 말았습니다. 입국심사대에서 이것저것 까다로운 질문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거기다 부인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남편은 캐나다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부인이 그런 대답 정도는 영어로 당연히 잘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민생활 기간과 영어 실력은 관계없어

이민생활을 얼마나 오래했느냐와 영어 실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진 pixabay]

이민생활을 얼마나 오래했느냐와 영어 실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진 pixabay]

부부가 과히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입국심사대를 나와 짐을 기다리던 중 남편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부인한테 한마디 했습니다. “캐나다에 10년 넘게 살았으면서 영어를 그렇게 못해?” 안 그래도 세관원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버벅거린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던 부인은 남편이 던진 그 말 한마디에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캐나다에 오래 산다고 다 영어 잘하는 줄 알아?”

그렇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10년 아니라 20년, 30년을 살아도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안 쓰면 영어는 절대로 되질 않습니다. 이민생활을 얼마나 오래했느냐와 영어 실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한인 커뮤니티에 푹 파묻혀서 종일 영어 한마디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 십중팔구 영어를 못합니다. 영어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한인 커뮤니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민자입니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필자의 지인이 겪은 경험담입니다. 한국에서 증권 관련 금융기관에 근무한 그분은 한국에서도 영어를 꽤 잘하는 엘리트였습니다. 이민 와서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은행에 갔습니다. 은행원과 한국에서의 경력 등 사적인 얘기까지 하게 됐습니다.

캐나다 은행에 가면 창구직원이 고객과 별의별 농담과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다른 고객이 길게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떠들고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도 뒤에서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 이민 온 한국 사람은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마침 그 은행에서 증권 관련 경력 직원을 뽑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은행원이 즉석에서 그분한테 이력서를 써가지고 와 인터뷰를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인터뷰하는 동안 은행 담당자가 그분이 가진 증권 관련 풍부한 경험과 지식에 크게 감동을 해 바로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취직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스스로 그 은행을 그만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영어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부터 영어를 잘했고 은행에서 업무를 보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영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교과서 영어와 너무나 다른 생활 영어

일상생활에서 영어권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교과서 영어와 다른 게 너무 많다. [중앙포토]

일상생활에서 영어권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교과서 영어와 다른 게 너무 많다. [중앙포토]

그분의 설명입니다. “일하는 데는 전혀 영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브레이크 때(쉬는 시간)나 업무 시간 외에 직원들과 만나 농담하고 사적인 얘기를 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왕따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일만 잘할 수 있으면 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영어권 사람이 사용하는 영어는 교과서 영어와 다른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생활을 오래 함께하지 않는 한 교과서 영어에 충실한 한국식 영어는 끼어들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리지를 않습니다. 못 알아들으니 대화가 안 될 수밖에요. 필자 역시 캐나다회사에서 일하면서 일 자체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영어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터라 그분의 경험담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이민사회에서 이런 농담이 전해 내려옵니다. 영문과 출신 이민자는 남한테 절대로 자기 전공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뼈있는 농담입니다. 대학에서 4년간 영어를 전공했는데도 이민 와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꼬는 말입니다. 아니 현실과 동떨어진 잘못된 한국의 영어교육에 대해 비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비판해온 터라 필자는 그것을 지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민 와 일상생활을 통해 느낀 것을 몇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한국인의 영어에 대한 이중적 태도입니다. '배운 것 따로 표현 따로'의 문제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영어공부를 하고는 왜 실제로 사용할 때는 배운 대로 써먹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캐나다에 조기 유학 왔던 중학생 얘기입니다. 캐나다에서 3년 지내는 동안 거의 현지발음으로 영어를 하게 되었을 즈음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배터리(Battery)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 학생은 캐나다에서 배운 대로 '배러리'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야유했다고 합니다. 마치 '지가 유학을 갔다 왔으면 갔다 왔지 영어발음을 건방지게 한다'는 듯이 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서 '배러리' 아닌 '빳데리'로 발음 교정한 조기 유학생

원어민 강사한테 배운 대로 말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모욕을 주고 삐딱한 태도로 바라본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중앙포토]

원어민 강사한테 배운 대로 말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모욕을 주고 삐딱한 태도로 바라본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중앙포토]

결국 그 학생은 '배러리' 발음을 포기하고 유학 가기 전처럼 '빳떼리'라는 발음으로 원위치했다고 합니다. 돈 들여 유학 가서 배운 영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권 사람한테 '빳떼리'라고 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원어민 강사가 많이 들어와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학교 교실이나 학원 강의실에서 원어민 강사한테 배운 대로 교실 밖이나 강의실 밖에서 영어를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배운 대로 영어를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모욕을 주고 삐딱한 태도로 바라본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또 하나 한국 교육 당국의 어문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국방송의 오락프로그램을 보다가 참으로 황당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수 김연자 씨가 불러 유행하고 있다는 노래 제목 때문입니다. TV 화면에 자막이 나오는데 제목을 '아모르 파티 표기했고 사회자도 그대로 발음을 했습니다. 무슨 파티를 할 때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습니다.

노래를 듣는 내내 가사 내용이 파티와는 연관이 없어 보여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Amor Fati'였습니다. '아모르 화티’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원래 발음과 전혀 다른 표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F와 P는 엄연히 다르게 발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생활영어로 연결되려면 한글표기도 원래 발음에 가깝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게 원래 발음과 다르게 엉뚱하게 한글로 표기하는 단어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단어를 원래 발음대로 한글 표기를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외래어 표기에 대한 어문정책이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외 나가면 한국인이 영어를 가장 못 하는 국민 중 하나라는 불명예를 안고 지내야 하는데도 그런 어문정책을 계속 고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호석 밴쿠버 중앙일보 편집위원 genman2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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