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병풍·의자까지 … 덕수궁에 재현된 왕실의 소박한 위엄

중앙일보

입력 2018.04.1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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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고종황제의 침전이자 대신들과 집무를 보던 장소였던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병풍 '오봉병'과 접이식 이동의자 '용교의' 등이 재현되었다. [사진 아름지기]

고종황제의 침전이자 대신들과 집무를 보던 장소였던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병풍 '오봉병'과 접이식 이동의자 '용교의' 등이 재현되었다. [사진 아름지기]

벚꽃이 만개한 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 잡은 덕수궁 함녕전 앞에선 한 무리의 관광객이 순서를 기다리며 사진 찍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담으려고 하는 대청마루 풍경에는 왕실의 품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오봉병과 용교의가 보였다.

아름지기재단·에르메스 등 힘 모아
함녕전 집기 재현 3년 프로젝트 완성
궁궐에 새 숨결 … 전통 문화 맥 이어

오봉병은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뒤에, 사후에는 빈전(장례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의 어진 뒤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궁중회화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병풍이다. 용교의는 다리가 X자형으로 접히는 임금의 이동식 의자다. 얼마 전까지 아무 것도 없어 휑했던 대청마루에 오봉병과 용교의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포토 존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의 현대적 계승을 위해 활동하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와 문화재청, 문화유산국민신탁, 그리고 프랑스 럭셔리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 코리아의 협력으로 2015년부터 17년까지 진행된 ‘덕수궁 함녕전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의 결과다. 아름지기 신연균 이사장은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궁궐’이 되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라며 “전각의 내부 공간을 정비하고, 장인정신이 깃든 공예품과 여러 생활 집기 등을 재현해 궁궐 전각의 품위와 가치를 드높이는 동시에 전통공예의 생산과 소비가 장인들과 함께 선순환 되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왕비의 침전으로 알려진 함녕전 서온돌 창문에 재현된 전통 커튼 ‘무렴자’. 사용하지 않을 때는 돌돌 말아 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사진 아름지기]

왕비의 침전으로 알려진 함녕전 서온돌 창문에 재현된 전통 커튼 ‘무렴자’. 사용하지 않을 때는 돌돌 말아 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사진 아름지기]

어느 나라나 왕이 기거했던 궁궐은 당대의 규범과 격식을 갖춘 최상의 건축물이자 최고의 문화예술이 집약된 장소다. 따라서 궁궐의 전각 내부를 정비하고 공예품과 집기를 재현하는 일은 우리 전통 문화의 맥을 잇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덕수궁의 함녕전은 고종황제의 침전이자 사신들을 접견하고 대신들과 집무를 보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건축물만 보존돼 왔을 뿐,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 텅 빈 공간에 사람의 온기와 숨소리를 불어넣는 것이 목표였다.

아름지기는 2014년부터 왕실 공예 전문가인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를 비롯해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학예사,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김왕직 교수, 아름지기 정민자 고문 등을 자문위원으로 구성해 각 분야의 전통 공예 장인들과 협업했다. 장경희(58) 교수는 “공간에 가구가 놓여 있으면 ‘누군가 잠시 외출한 듯’ 사람이 살았던 공간으로 인지하게 된다”며 “텅 비었던 공간에 장인의 작품들을 채워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도록 한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의의”라고 설명했다. 서준(59) 학예사는 “문화재 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의 쓰임새를 정확히 연구하고 파악해 그 기능에 맞는 집기들을 설치하는 일”이라고 했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붉게 염색한 후 한올한올 엮고 있는 장인의 모습. [사진 아름지기]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붉게 염색한 후 한올한올 엮고 있는 장인의 모습. [사진 아름지기]

이에 따라 2015년에는 함녕전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한 왕의 침전 동온돌과 왕비의 침전 서온돌의 장판과 도배를 정비하고, 창문 앞에는 커튼의 일종인 무렴자를 드리워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이를 위해 온지음 옷공방의 김정아 선임연구원, 유선희 누비 장인, 홍성효 소목 장인, 김은영 매듭장인 등이 힘을 보탰다.

2016년에는 서울 5대 궁궐 중 처음으로 대청마루 앞에 외주렴을 설치했다. 주렴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주홍칠을 해서 엮은 발이다. 발을 엮을 때도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많이 쓰였던 거북이 등짝 모양의 육각형 모양을 냈다.

2017년에는 대신들과 업무를 보던 장소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해 대청마루에 어좌를 들이는 작업으로 용교의와 용문석(왕을 위한 돗자리), 용평상 그리고 오봉병을 재현했다. 이를 위해 경복궁 건청궁에 재현된 용교의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정수화 장인(국가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기능보유자)과 이강연 소목장, 박성규 칠피장, 안이환·허대춘 두석장 등이 힘을 합쳤다.

이로서 3년에 걸친 함녕전 프로젝트는 마침표를 찍었다. 장경희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질 21세기 문화재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며 “100년 후 후손들에게 이 모습이 그대로 이어지려면 향후 보존·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녕전 동온돌과 서온돌이 고종황제 당시의 모습을 가지려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 보료 등의 직물 집기를 설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습기로 인해 직물이 썩지 않도록 실내 온도를 유지하려면 전기온돌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의 온돌을 뜯고 전기배선을 숨기는 공사를 해야 한다. 천장 도배도 제대로 못한 상태다. 화재방지 감지기가 설치된 탓이다. 옛것이 아닌 현재의 과학기술 장비 그대로의 모습으로 천장 겉면에 불쑥 드러난 화재감지기는 대한제국시절로 떠나려는 관광객의 상상력을 방해하는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3년에 걸쳐 수많은 이들의 힘이 모아져 완성된 ‘덕수궁 함녕전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가 미래까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21세기형 문화재 보존 매뉴얼 또한 재정비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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