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방배초 인질사건’과 ‘아프리카 가나 피랍사건’ 등 우리 국민이 얽힌 두 건의 인질·납치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정부 당국의 ‘위기협상’이 도마 위에 올랐다. 위기협상이란 일반인은 물론 경찰이나 공무원조차 생소한 용어다. 이는 인질범, 자살기도자, 정신질환자 등 위기에 놓인 인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화로써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미국 등에서는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경찰 위기협상관이 출동할 정도로 보편화된 개념이다.
위기협상의 가장 큰 무기는 ‘시간’을 끄는 것 #“인질범 요구 따르면서 최대한 대화 많이 하라” #정부가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 안 돼…다양한 채널 열어둬야
지난 2일 벌어진 서울 방배초 인질극은 현장에 있던 학교보안관과 지구대 경찰관의 기지로 1시간 만에 범인 양모(25)씨를 체포하고 피해 여학생 A양을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아프리카 가나 인근 해역에서 피랍된 한국인 3명은 여전히 생사와 행방마저 묘연하다. 일각에서는 납치 사태가 장기화하면 인질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도 커질 수 있다며 제2의 ‘아덴만의 여명’ 같은 무력 진압마저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위기협상 전문가들은 “손에 쥔 패가 유리하다고 게임에서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고 지적한다. 심리적으로 쫓기는 건 가해자인 인질범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내 1호 ‘위기협상’ 전문가인 이종화(55) 전 경찰대 위기협상연구센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교수는 2005년부터 미국 FBI, 뉴욕 경찰, 프랑스 경찰특공대에서 위기협상교육을 받은 후 2009년 국내 최초로 경찰대에 위기협상 과정을 개설한 인물이다.
Q. 국내 위기협상 전문가는 몇 명인가.
우리나라에서 위기협상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인원은 80명 정도뿐이다. 경찰에서는 2009년 경찰대에 위기협상 과정이 처음 개설됐고, 2014년 각 지방경찰청에 위기협상전담팀이 생겼다. 하지만 국제 범죄 사건은 여전히 외국 위기협상 전문회사에 맡기고 있는 현실이다. 외교부 통계를 보면 1년에 해외에서만 130~150건 납치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 부처에도 위기협상 전문가가 없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운 대목이다.
Q. 위기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인질범)의 감정을 읽어주는 것이다. 대화하는 동안만큼은 감정을 분출할 수 있고 인질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작정 “진정하라”“나와라”라고 윽박하는 것은 인질범을 자극해 사건 해결 도움이 안 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많이 힘들어 보인다”“무슨 일이 있었나”가 돼야 한다.
Q. 인질극에서 피해자의 생존요령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먼저 무조건 인질범 지시나 요구에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 동시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의 가족 얘기 등 대화를 형성해야 한다. 이는 모두 범인과 일종의 ‘유대 관계’(rapport)를 형성해 최후의 순간까지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또한 사건이 끝나고 나서도 피해자의 심리적 충격에 대한 치료와 지원이 중요하다. 피해자와 경찰관·협상전문가가 모두 모이는 자리를 갖는 것도 도움이 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피해자는 경찰이 시간을 끄는 행위에 대해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할 경우 가해자를 동정하는 ‘스톡홀름 신드롬’ 등 트라우마까지 생길 수도 있다.
Q. 위기협상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항상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현장 지휘관이나 경찰들은 범인을 체포하거나 사건을 빨리 해결하려고만 한다. 미국에서 위기협상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인질 피해자가 다치는 이유 중 80%가 무리한 작전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 가장 최근 사례만 봐도 지난해 7월 경남 합천에서 초등학생 아들을 인질로 붙잡은 ‘엽총 인질극’이 벌어졌다. 당시 직접 현장에 가서 무려 23시간의 밤샘협상 끝에 범인을 설득하는데 성공해 자수하도록 만들었다.
Q. 실제 잘못된 사례가 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은 1988년에 벌어진 ‘지강헌 인질극 사건’이다. 당시 경찰 현장지휘관이 “야 도망갈 생각하지 마!” 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이 나온다. 범인을 단순 흉악범으로 취급하면서 협상은커녕 감정만 격화됐다.
심지어 4년 전까지도 강원도 ‘22사단 총기 난사사건’에서도 이런 방식은 반복됐다. 당시 군은 범인과 대치상황에서 그의 부모님을 현장으로 불렀다. 이를 ‘제3자 중재인’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잘못된 관행이다. 만약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무장한 상태로 2만명의 병사에게 쫓기고 있는데 아버지를 현장에서 마주했을 때 서로 심정이 어떨까? 결국 자살시도까지 벌어져 돌발상황이 일어난 사례다.
Q. 방배초 인질극에서 미흡했던 점은
방배초등학교 사건에서 범인을 가장 먼저 설득했던 사람은 교사도 경찰도 아닌 학교보안관이었다. 범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등 초동 대처가 매우 훌륭했다. 다만 나중에 도착한 경찰관들이 30~50명씩 현장을 에워싼 모습은 실수였다. 대화 상대가 한 명이 아닌 여러명일 때는 신뢰관계가 달라진다.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범인이 정신이상자였던 점이 오히려 사건해결에 유리하게 작용한 측면이 크다.
Q. 가나 인질극 등 국제범죄는 어떻게 해결하나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국가가 테러범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요구를 수용하는 선례를 남길 경우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결국 선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이 있는 선사나 가족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대부분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은 인질의 90% 이상이 생존한다. 현재 문무함을 급파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다. 테러 단체들은 하나의 조직이 아닌 여러 군소 조직으로 얽혀있다. 이들이 우리나라 군함으로 인해 생계가 막히면 협상카드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Q. 정부나 위기협상 전문가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정부는 정보제공이나 협상 전략 등의 신뢰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해주는 게 중요하다. 피랍 지역의 현지 당국조차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질·납치 등 대테러 문제가 일어나는 곳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한 경우가 많다. 부패한 정부 관계자가 범인들과 결탁한 경우도 많다. 몸값을 지불하는 과정에서도 아찔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1~2년 전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선원이 납치됐을 때 선사와 가족이 정부의 도움이 없이 엉뚱한 사람에게 몸값을 전달해 인질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Q. 위기협상이 현장에서 더 활용되려면 개선돼야 할 점이 무엇인가.
직업 특성상 위기상황을 많이 겪는 직업군 경찰 소방 군인, 사회복지사 등이 소명의식을 갖고 사건 해결에만 치우친 업무관행을 바꿔야한다. 위기협상관 자격 제도를 채용이나 승진에 활용함으로써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또한 국내에서 위기협상 전문인력이 양성되는 코스를 경찰뿐만 아니라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위기협상전문 인력을 충분히 양성해 각 정부 부처나 일선 서마다 배치하고, 위기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확립해야 한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