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불만이 많다. 대학병원 의사인 남편은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고, 두 아들은 대학생활에 바쁘다. 매일 텅 빈 집에 혼자다. 애써 할 일을 찾아보지만 뾰족한 게 없다. 웬만한 집안일은 자동으로 돌아간다. 늘 하던 것이라 하나도 안 어렵다. 성당 봉사활동을 늘렸지만 고작 일주일에 두 번이다. 매일 헬스센터에도 나간다. 운동하고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낸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의사와 결혼한 그녀. 둘째를 출산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넉넉한데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현모양처(賢母良妻), 아이만 잘 키우면 되지!” 둘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남편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모든 게 공허하다. “제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제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이제 불만이 없다. 남자가 생겼다.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했다. 그날 그 자리에 안 갔어야 했다. 남녀 각각 셋, 여섯이 만났다. 오랜만에 대학 시절 분위기가 났다. 파트너가 맘에 들었다. 잘나가는 레스토랑 사장이다. 안 하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블루스도 췄다. 남편과 다른 뭔가가 있다. 시작은 참 어려운데 진행은 순조롭다. 커피숍에서 만나고, 공원도 거닐고, 영화도 봤다. 그리고 그날, 절대 안 갔어야 했다. 남들 안 하는 길로 들어섰다.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불여악처(不如惡妻), 빨리 정리하면 되겠지!” 두 남자에게 잘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 들키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이제 남편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 이렇게 5년이 지났다. 모든 게 즐겁다. “이대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요?”
어긋난 길임을 알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 사람이 앞만 보고 뛰어가고 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현대인은 남들이 시키는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살아간다. 한 성공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남들과 똑같이 일찍 퇴근하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주말에 데이트하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성공의 일급비밀은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다.” 그녀는 남들 하는 대로 살았다. 무기력과 공허에 빠졌다. 지금 남들과 다르게 살고 있다. 즐거움과 활력이 넘친다. 그런데 뭔가 불편하다. 죄의식 때문이다.
죄의식은 잘못을 느끼고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칭찬과 꾸지람을 통해 성장한다. 보상과 처벌을 통해 발전한다. 죄의식은 꾸지람과 처벌로부터 학습된다. 적당한 죄의식은 사회생활의 감초다. 처벌은 협력을 유도한다. 내 이익을 얻으려면 남의 이익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면서 처벌을 감행하기도 한다. 화난 감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처벌이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죄의 대가가 끝나 죄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죄의식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재료다.
죄의식에 자주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작은 실수도 처벌받아야 할 죄로 취급한다. 상대의 실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하는 사람을 나약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조차 용서하지 못한다. 간혹 정의의 가면을 쓰면 남들에겐 가혹하고 자신에겐 관대하다. 지나친 죄의식은 파괴적 비판 가정에서 자란 경우에 잘 나타난다. 엄격한 종교적 영향에서도 온다. 지나친 죄의식은 사회생활의 독소다. 죄의식·적대감·수치감은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3대 부정적인 감정이다.
부부는 사회를 구성하는 일차관계다. 네 가지 역할이 있다. 섹스파트너, 친구, 사업동반자, 상보자(相補者)이다. 부부는 결혼식에서 서약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네 가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의미다. 결혼생활에서 한두 개만 만족하더라도 부부관계는 유지된다. 물론 불만이 생긴다. 오래 쌓인 불만은 언젠가 폭발한다.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잘 돌봤다. 훌륭한 상보자다. 그런데 다른 역할에 구멍이 난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우리는 타자가 지배하는 세계에 태어난다. 타자를 대표하는 것이 언어다. 우리는 내 욕망보다 남이 정해놓은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아간다. 욕망을 결정하는 주체가 나인데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산다. 타자의 인정에 목말라 한다.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금지된 것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 다닌다. 타자가 만들어 낸 언어적 질서(사회)는 완벽하지 않다. 인정을 통해 욕망을 실현하지만, 결국 타인의 욕망에 지배된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욕망에 눈뜨게 된다.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무엇인가.
자,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보자. 첫째, 그녀는 어긋난 길을 가고 있다. “무엇이 옳은가?” 남편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죄인가 자연의 순리인가. 요즘 애인이 있는 사람이 늘어간다. 가정을 가진 부인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러기도 한다. 세태가 바뀌고 있는 것인가.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는 것인가. 애인 있는 남자가 있으면 애인 있는 여자가 있다. 성경에 한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왔다. 예수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둘째, 그녀는 방황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려서 부모의 욕망을 위해 살았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편의 욕망을 위해 살았다.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두 아들을 성공적으로 키웠다. 타자의 욕망 안에선 자신의 시간을 찾을 수 없다. 이제 그녀의 욕망에 따라 살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공허하고, 저렇게 살아도 불편한 까닭은 무엇인가. 인생의 시간을 절반 이상 써버렸기 때문인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괴로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괴로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셋째, 그녀는 자기를 찾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마하리시는 17세 때 죽음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성자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냥 고요히 바라본다.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 그윽한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침묵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없는 축복에 휩싸인다. 그는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반복해서 나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찾을 때까지 찾아라. 찾게 되면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우면 놀라게 되고, 그리하면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 후박사 이후경 - 정신과의사, 경영학박사, LPJ마음건강 대표. 연세대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거쳐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임상집단정신치료] [후박사의 마음건강 강연시리즈 1~5권] [후박사의 힐링시대 프로젝트]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