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잘 나갈 때 퇴직 이후를 대비하라

중앙일보

입력 2018.04.07 15:02

업데이트 2018.05.15 09:45

[더,오래] 이상원의 포토버킷(18)

고등학교 시절 재미있게 봤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절벽만 건너가면 성배를 찾을 수 있었던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분). 그러나 절벽에 다리는 없고 허공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상처 입은 인디아나 존스의 아버지(숀 코너리 분)는 간절하게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가져…"라고 중얼거린다. 아버지의 바람이 통했는지 인디아나 존스는 허공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어 무사히 건너간다.

신세계백화점 공채 1기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현재는 패션 유통회사 코웰패션(COWELL)의 영업부문장으로 맹활약하는 박병준 상무(51). 직장인으로서 여러 위기를 멋지게 돌파한 비결을 묻는 말에 답하는 그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거의 30년 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믿음의 힘으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 낸 ‘코웰패션’ 박병준 상무. [사진 이상원]

믿음의 힘으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 낸 ‘코웰패션’ 박병준 상무. [사진 이상원]

직장생활에 위기가 찾아오면 누구나 절벽 끝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듯한 공포감을 느낄 겁니다. 이때 무엇보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한 걸음 내디뎌 보면 낭떠러지가 아니고 힘들지만 걸을 만한 오르막길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박 상무에게 “아~ 그거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아니에요?” 라고 묻지 않았다. 그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답을 했든 안했든, 머리로 생각해 낸 답이 아니라 거의 평생의 경험을 통해 얻은 생각이라는 걸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 상무에게는 인생의 위기가 여러 번 있었다. 대학 시절, 지방에서 사업을 크게 일구던 부친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첫 번째 위기였다. 부하직원이 회삿돈을 챙겨 야반도주해 회사가 어려워진 충격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 졸지에 동생 둘을 포함해 다섯 식구의 가장이 된 박 상무였지만, 다행히 졸업 전이었던 1992년 취업에 성공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80명 모집에 1만명 넘게 지원해 당시 큰 화제가 되었던 ‘신세계백화점 공채 1기’ 모집에 162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162 대 1의 입사경쟁 뚫고 들어간 신세계 백화점

비록 신세계백화점 합격 바로 직전 있었던 모 방송국 아나운서 선발시험에서 아깝게 탈락했지만, 어려워진 가정형편을 두고 자신의 꿈만 좇을 수는 없었다. 4명 모집에 약 1200명이 지원한 시험에서 최종면접까지 갔으니 같은 방송국에 한 번 더 지원해 보거나 다른 방송국에 지원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니었겠나. 여담이지만, 박 상무는 그때 못 이룬 꿈을 회사생활 또는 신앙생활 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멋진 진행으로 살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

못다 이룬 MC 꿈을 직장에서 펼치고 있는 박병준 상무. [사진 이상원]

못다 이룬 MC 꿈을 직장에서 펼치고 있는 박병준 상무. [사진 이상원]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했을 때 ‘나를 뽑아준 회사가 고맙다. 나도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덕분에 회사생활 내내 잘 나갈 수 있었다. 백화점의 꽃이라고 하는 여성복 매장 매니저로 시작해 특진도 했고 특별한 교육기회도 많이 받았다.

2007년 3월 드디어 우수한 성적으로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당시 회사의 꽃이었던 강남 신세계백화점의 여성복 팀장을 맡았다. 이후 본사의 요직으로 자리를 옮겨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던 그에게 인생의 두 번째 위기가 닥친다. 그의 나이 사십 초반 때였다.

2011년 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억울할 수 있는 이유로 당시 상대적으로 한직이었던 온라인 부서로 좌천됐다. 하지만 언제나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인 지라 온라인 부서에서 눈에 띄게 높은 성과를 냈다. 마침 모바일 쇼핑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인생의 위기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한참 높은 성과를 올리던 중 갑작스럽게 팀장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인사가 나 ‘아, 나가라고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2012년 1월 근속 20년을 바로 앞둔 시점에 퇴사할 수 밖에 없었다.

글 앞머리에 박 상무가 ‘절벽 끝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듯한 공포감’이라 표현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 실제로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극단적인 결심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아니었으면 결심을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고. 이후 금식기도원에 들어가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던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다.

같은 회사 출신이 대표로 있던 아웃렛 회사에서 영업본부장으로 오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에 비하면 규모, 브랜드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자리였지만 그동안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명품매장도 유치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살아날 줄 모르는 경기와 그로 인한 매출저조 등이 원인이 돼 회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의 세 번째 위기를 맞았던 이때는 이전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한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차분하게 패션 시장에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며 활약할 기회를 찾았다. 2014년 초 신세계백화점 공채2기 출신으로 일찌감치 독립해 코웰패션을 창업하고 매출 1000억원대의 회사로 키워 낸 이순섭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한밤중에 전화를 받고 몇 가지 서로 중요한 것만 확인하고 흔쾌히 요청에 응답했다.

회사도 박 상무도 이때부터 날개를 단 듯 고속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 회장은 엘레쎄, 푸마 등 명품 브랜드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언더웨어에 적용, 직접 디자인해 제작한 것을 홈쇼핑에 판매했다. 이것이 ‘대박’을 쳐 뜨겁게 타오르던 터에 박 상무가 경험과 노하우, 네트워크 등을 활용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박 상무 합류 후 회사 매출 350% 급성장

아디다스 언더웨어, 안나수이, 굿상아 등을 거쳐 최근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아.테스토니(A.Testoni)’까지 홈쇼핑 시장에서 줄줄이 빅히트를 친 것이다. 회사도 박 상무 합류 이후에 매출 1000억원대에서 3500억원대로 크게 성장했다. 코웰패션은 이제 패션뿐 아니라 의류, 잡화 등 토탈 패션그룹으로 시장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최근 홈쇼핑 판매로 큰 화제가 되었던 ‘아.테스토니’의 대표와 함께. [사진 이상원]

최근 홈쇼핑 판매로 큰 화제가 되었던 ‘아.테스토니’의 대표와 함께. [사진 이상원]

박 상무에게 계속해서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역전홈런을 친 비결 중에서 특히 정신적인 면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물었다.

20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에서 안 좋게 나왔을 때가 사십 초반이었는데 처음에는 원망이 컸죠. 솔직히 전 직장 쪽은 가까이 가기도 싫었고 빙 둘러갈 때도 있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직해 다른 경험을 하면서 오랜 생활 좋은 시스템 안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기 시작했지요. 신세계백화점에서의 경험, 노하우, 인맥 등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해외 명품을 국내 홈쇼핑에 소개할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이순섭 회장이 개척해 놓은 역할이 크지만 역시 신세계백화점 공채 출신이잖아요? 처음에는 전 직장을 원망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감사합니다.

이순섭 회장과 멋진 콤비플레이를 자랑하는 박 상무. [사진 이상원]

이순섭 회장과 멋진 콤비플레이를 자랑하는 박 상무. [사진 이상원]

결과가 좋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덧붙이면서 현재 비슷하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비결 하나만 전해달라고 부탁해 봤다.

힘들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응어리가 커지고 딱딱해집니다. 뭐라도 해서 바빠야 합니다. 너무 맞는 일을 고르려고 하지 말고 처음에는 작은 기회라도 잡아야 합니다. 저도 처음 신세계백화점 나왔을 때 들어간 작은 회사가 아주 도움이 되었어요. 거기에서 대기업과는 다른 문화에 조금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회사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죠.

"직장인은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 돼야"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 특히 중년이거나 중년을 앞둔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부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 정말 힘듭니다. 평소에 ‘언제라도 나가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은 ‘딴생각’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게 오히려 직장생활 하는 데에도 집중력이 생기고 좋습니다. 회사에 있을 때 숫자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그리고 손익지표와 관련한 업무를 경험해 보는 것이 필수입니다. 퇴사하고 직장생활을 다시 해도, 직접 창업을 해도 숫자와 매출이 가장 중요합니다. 흔히 대기업 출신이 조직에서 나오면 전투력이 없다고 하는데, 바로 숫자와 매출에 관한 긴장감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아, 직장인이라면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보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좋습니다. 회사에서나 나와서나 경영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대우받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직장 내 젊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스페셜리스트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답을 들으면서 나 역시 속으로 ‘뜨끔!’ 찔렸다. 회사 다닐 때 분명히 들었을 만한 조언이었을 텐데 그때는 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까. 그래서 퇴사 이후 필요 이상의 수업료를 얼마나 치렀는가. 곧 찾아뵙고 “그때 조언 감사했습니다. 말 안 듣고 고집 피우다가 X고생 했습니다”라고 고백할 선배가 지금 막 떠올랐다. 글을 읽고 있는 직장인에게 간절히 바란다. 박 상무의 조언을 꼭 새겨듣기를. ‘다 아는 얘기잖아?’ 생각하는 사람들,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나처럼.

마지막으로 박 상무에게 꿈과 계획을 물었다.

회사에나 저 개인적으로나 중요한 시기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좋은 시절 즐기다가 위기를 맞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을까요? 잘 나갈 때 미래에 잘 대비해야지요. 개인적인 소망 하나는, 전 직장 선후배 동기들이 회사를 나왔을 때 잘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제가 그랬듯이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기회를 잡는 데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요. 지금은 저도 아직 많은 면에서 부족합니다. 더 노력해야지요. 지금까지 직장생활 한 것보다 더 긴 시간이 남았지 않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대화를 나누면서 개인적으로 지난 시간을 많이 떠올린 인터뷰였다. 박 상무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버티는 힘이 강한 그였기 때문에 당연한 보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박 상무의 한마디가 인디아나 존스 아버지가 ‘절벽처럼 보이는 다리’ 앞에 선 아들에게 바라는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한 마디와 오버랩 되어 들렸다.

절벽처럼 보이는 다리로 한 걸음 내디딘 인디아나 [사진 영화 <인디아나 존스> 화면 캡처]

절벽처럼 보이는 다리로 한 걸음 내디딘 인디아나 [사진 영화 <인디아나 존스> 화면 캡처]

믿음의 힘으로 멋지게 버틴 박 상무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이번 주말, 새로이 마음을 다져야겠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다시 보면서.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저자 jycyse@gmail.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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