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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수능 등급제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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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전성은 선생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1년 뒤쯤 봉하마을에서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을 만나 한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교육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배우겠다”며 전 전 교장부터 찾았다. 거창고가 자타 공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학교’였으니 뜬금없는 일도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초대 교육혁신위원장에 앉힌다. 시골 학교 교장에게 교육개혁의 방향타를 맡긴 것이다. 다시 노 전 대통령의 술회. “선생의 말씀대로 교육개혁을 했으면 우리 학생들이 좀 더 행복해졌을 텐데 그 방향으로 과감하게 나가지 못했습니다. 전 선생의 교육 방향은 분명 맞습니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전 전 교장의 교육철학은 그가 쓴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에서 엿보인다. 학교는 국가 필요에 의한 인재양성소일 뿐 인간을 더 인간답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게 요체다. “결국 아이들은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 친구와의 놀이도 반납하고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에만 매달리게 된다”는 거다. 무엇보다 입시를 비판하는 날이 날카롭다. “우리 입시제도는 경쟁이다. 네가 들어가면 내가 못 들어간다. 경쟁을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하던 고대국가와 식민지국가에서 하던 정책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전근대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아 밑그림을 그린 2008학년도 대입안은 이런 교육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능 등급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1점 차이를 따지는 점수제가 아니라 9개 등급으로만 수능 성적을 매겨 학생들의 입시 부담을 덜고 경쟁을 완화한다는 취지다. 이상은 좋았지만 입시 현실은 냉혹했다. 학생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결함 탓에 극심한 입시 대란을 겪었다. ‘로또 수능’ ‘복불복 입시’란 아우성까지 나왔다. 급기야 새로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이듬해부터 등급에다 표준점수와 백분위까지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시행 1년 만에 수능 등급제가 폐지되는 수모를 당한 셈이다.

교육부가 또다시 대입 정책으로 뭇매를 맞고 있다. 핵심은 대선 공약인 ‘수능 절대평가’ 추진이다. 수능을 자격고사화해 입시 부담을 덜어준다는 거다. 노무현 정부 수능 등급제의 데자뷔다. 여기에다 정시모집 확대, 수능 최저학력기준 폐지 같은 복병이 등장해 혼란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입시 ‘마루타’인 학생들만 애가 탄다. 이제 교육부는 입시에서 손을 떼고 대학 자율에 맡길 때도 됐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