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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자위대 황당한 문건 은폐…되살아난 日 군국주의 망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4일 오후 3시30분 일본 도쿄도 네리마(練馬)구에 있는 육상자위대 아사가스미(朝霞)기지에선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전국 5개 방면으로 나뉘어져 있는 육상자위대를 모두 묶어 관할하는 통합사령부,‘육상총대(陸上總隊)’의 현판식이다.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방위상과 육상 자위대 간부들이 참석했다.

이라크 파병 문건 존재,방위상에게 1년동안 보고 안해 #국회에서 "문건 없다"발언 1년여만에 "있다"로 뒤집어 #'제복조' 군인들이 '양복조'민간인 지휘부 따돌렸나 #日 야당 "자위대에 대한 문민통제에 구멍,적신호" #54년 창설이후 처음으로 통합사령부 창설됐지만 #산케이 신문조차 "국민 신뢰 잃어,문민통제에 오점"

 그동안 해상자위대엔 ‘자위함대’, 항공자위대엔 ‘항공총대’라는 통합사령부가 존재했지만 유독 육상자위대에만 그런 조직이 없었다.
과거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과정에서 일본 육군이 독자통수권을 휘두르며 폭주한 데 대한 반성 차원이었다.
하지만 아베 내각은 1954년 육상자위대 창설이후 처음으로 중국의 위협등을 핑계로 통합사령부 설치를 용인했다. 육상자위대로선 경사였다.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EPA=연합뉴스]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EPA=연합뉴스]

#같은날 오후 8시 오노데라 방위상이 참담한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지난해 3월27일 육상자위대 연구본부내부의 외장형 하드디스크에서 발견됐다. 문건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상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됐다.”

오노데라 방위상이 말하는 문건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시절인 2004~2006년 유엔 평화유지군(PKO)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육상자위대의 활동보고서(일보·日報)다. 376일분, 약 1만4000페이지라고 한다.

 지난해 2월 당시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국회에서 '이라크 일보가 있느냐'는 질문에 “찾아봤지만 없었다”고 답했다.

지난해 6월 3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한ㆍ일 국방장관 회담에 앞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왼쪽)이 이나다 도모미 일본 방위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지난해 6월 3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한ㆍ일 국방장관 회담에 앞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왼쪽)이 이나다 도모미 일본 방위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사실 당시엔 이라크가 아닌 남수단 PKO의 보고서가 더 문제였다. 보고서를 둘러싸고는 “자위대원들이 ‘전투’라는 표현을 썼다는데 비전투지역에 파견된 자위대원들이 왜 ‘전투’라는 표현을 썼느냐”라는 논란으로 일본 전체가 들끓었다.

남수단 파병 일본 육상자위대[중앙포토]

남수단 파병 일본 육상자위대[중앙포토]

결국 이나다 방위상이 “폐기했다”고 주장했던 '남수단 PKO 일보'의 일부가 공개되면서 이나다 방위상 퇴진의 원인이 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난 2일 오노데라 방위상이 갑자기 “확인결과 사실은 이라크 일보가 남아있다”고 발표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대두된 것이다.

 2일 발표때만해도 오노데라 방위상은 육상자위대가 ‘이라크 일보’를 처음 발견한 게 올 1월이라고 했다. 하지만 4일엔 “지난해 3월27일 육상자위대내부의 연구본부(교육훈련본부)가 이를 발견했다”고 했다.

육상자위대가 '이라크 PKO 일보'를 이미 확인해 놓고도 1년 넘도록 가만히 있다가 지난 3월 말에야 이를 오노데라 방위상에게 보고한 셈이다.

자체조사에서 관계자들은 "당시엔 남수단 문건을 찾는데 열중했기 때문에 이라크 일보까지 보고할 필요를 못느꼈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육상자위대의 어느 선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방위상과 부대신, 정무관 등 방위성을 지휘하는 '민간인 정무3역’에겐 일체 보고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언론들과 야당은 이를 두고 “군(일본의 경우엔 자위대)은 정부의 지휘와 통솔에 따라야 한다는 이른바 ‘문민 통제 시스템(시빌리언 컨트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냐","문민통제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제복조’라고 불리는 육상자위대 간부들이 ‘양복조’로 불리는 민간인 지휘부를 따돌리고 조직적으로 은폐했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창설 64년만의 통합사령부 현판식과 문건 은폐 의혹, 육상자위대로선 불과 몇시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도대체 왜 일본 사회는 유독 육상 자위대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걸까.

과거 일본의 육군은 정부가 아니라 일왕(일본에선 천황)의 군대였다. 정부와 대등한 입장에서 정부가 아니라 일왕의 지휘만 받는 조직이었다.
내각의 육군성 장관인 육군대신도 현역 육군대장이 맡았다. 육군대신이 쥐고 있는 군정권도, 일선 군대의 군령권도 모두 육군이 장악했다. 정부의 컨트롤을 받지 않는 육군의 전횡은 일본을 군국주의로 치닫게 했다. 육상자위대에 대한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는 그만큼 뿌리가 깊다.

일본내에 우익적인 목소리를 대변해온 산케이 신문까지도 5일자에서 “통합사령부인 육상총대의 발족등 대규모의 조직 개편은 국민의 신뢰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육상자위대가 결과적으로 방위상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만큼 문민통제의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5일 일본 참의원 외교ㆍ방위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문민통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오노데라 방위상의 즉각 사임을 요구했다. 자위대를 통솔할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이에 오노데라 방위상은 “문건이 없다는 게 나도 납득이 가지 않아 두번 세번 다시 조사하라고 지시했기때문에 (결과적으로 문서의 존재가)확인된 것”이라며 “문민통제는 작동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아베 신조 총리(아래)와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EPA=연합뉴스]

아베 신조 총리(아래)와 오노데라 이쓰노리 방위상.[EPA=연합뉴스]

 아베 내각은 ‘문건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남수단 PKO일보 문제,사학재단 가케(加計)학원의 수의학과 신설 관련 문서, 모리토모(森友) 사학재단 국유지 헐값 매입 특혜 관련 문서 조작, 재량노동제 관련 부실 데이터 논란에 이어 문서 폭탄이 또 터졌다. 안그래도 지지율 저하에 고민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에겐 또다른 대형 악재다.

특히 육상자위대가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평화헌법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꿈은 봄비에 흩어지는 벛꽃처럼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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