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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평양의 붉은 융단 떼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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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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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예정인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미리 볼 기회가 있었다. 여기엔 걸그룹 레드벨벳 등 한국의 방북공연단과 맞물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의 런던 직관(직접 관람) 사진으로 전 세계적 화제가 된 에릭 클랩턴 공연과 김정은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준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먼의 평양 방문 얘기다.

태영호는 영국 주재 시절인 2007년 김정일로부터 에릭 클랩턴의 평양 공연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에릭 클랩턴 광팬인 아들 정철이 졸랐는지 김정일은 공연 성사에 집요하게 집착했다고 한다. "대리인이 100만 유로(당시 환율 15억원) 선불을 요구하더라"고 보고하니 당장 승인이 떨어졌다. 그런데 한참 만에 '북한 인권 상황 때문에 평양에 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에릭 클랩턴은 끝내 평양에 가지 않았다. 김정철은 어쩔 수 없이 김정일 사후인 2015년 5월 런던 공연 티켓을 사서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
김정은이 광팬이라는 기행과 악행으로 유명한 미 NBA농구스타 로드먼의 방북과 얽힌 사연도 있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고모부 장성택의 끔찍한 숙청 사건 이듬해인 2014년 12월 태영호는 평양에서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영국 다큐멘터리 제작사로부터 로드먼 방북을 다룬 영화 1차 편집본을 받아 평양으로 보내라는 요청이었다. 로드먼이 평양에 들락거린 건 알아도 북한이 이를 선전하려고 영화 제작까지 합의한 사실은 이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편집본 전달 후 사달이 났다. 영화 초입에 장성택 처형 사진이 한 장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평양에선 "로드먼 방북은 김정은의 대외적 권위와 관련된 것이니 장성택 사진을 무조건 빼라"며 "위협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영화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2013년 2월 3차 핵실험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부정적 여론이 들끓던 시기에 로드맨과 웃으며 포옹하는 모습으로 개방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연출해 부정적 여론을 희석시키려던 김정은 농구 외교의 전말이다.
자, 이번엔 레드벨벳 얘기다.

평양공연 후 김정은과의 만남 뒤 인터뷰 영상. [사진 방송 캡처]

평양공연 후 김정은과의 만남 뒤 인터뷰 영상. [사진 방송 캡처]

"악수조차 할 줄 몰랐는데 너무너무 영광이었고요. "
레드벨벳 한 멤버는 김정은과 악수한 후 한 방송과 이렇게 인터뷰했다.
모처럼 남북 화해 무드 속에 무사히 마친 공연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복형 김정남을 남의 나라 공항 한복판에서 독살하고, 자기 나라로 여행 온 평범한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17개월 동안 억류했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인권 유린 국가의 3대 세습 독재자와 악수 한 번 했다고 들떠서 "너무너무 영광"이라고 떠드는 건 다른 문제다. 초청한 나라의 지도자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걸 넘어 그를 선전하는 모양새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일부에서는 "김정은이 러비(레드벨벳 팬클럽)가 됐다"느니 "평양의 K-팝 인베이전이 시작됐다"고 우쭐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로드먼을 이용한 것처럼 '붉은 융단 떼거리들'(SNS에 돌아다니는 레드벨벳의 북한식 표현)을 활용한 게 아닌가 싶어 영 찜찜하다.
인권을 문제 삼아 거액 공연을 거절한 에릭 클랩튼까지는 못 되더라도 독재자의 환대에 김정은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가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산 데니스 로드맨이 돼서야 되겠나.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