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교과서가 '편견' 주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에콰도르에서 충북 보은으로 시집 온 일레나(오른쪽)가 에콰도르 음식인 바에자를 만들어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얘기하고 있다.

'필리핀계 한국인, 중국계 한국인, 러시아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2040년께 한국의 인구 총조사에선 이 같은 분류가 반드시 필요할지 모른다. 최근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다양한 계통의 혼혈인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이 작성한 '대체 이주에 관한 보고서(Replacement Migration.2000년)'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제활동인구(15~64세)를 최대 수준(3660만 명)으로 유지하려면 2020~2050년 사이 모두 640만 명(매년 21만30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이들이 국내에 정착해 2세를 낳을 경우 장기적으로 혼혈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다인종 시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단일민족 통념이 급속히 해체되고 있지만 혼혈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과 편견은 여전하다. 필리핀계인 이보희(7)양은 최근 석 달 새 유치원을 세 군데나 옮겼다. 친구들이 "피부색이 까맣다"며 따돌리는 등 적응하기 힘들어서다. 결국 이양의 아버지(45)는 부인과 함께 딸을 필리핀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씨는 딸이 필리핀에서 대학을 마칠 때까지 한국에 남아 뒷바라지할 계획이다. 그는"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나라에서 내 아이를 교육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 "교과서가 편견 주입"=혼혈문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편견과 차별에는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현행 역사.도덕 교과서가'단일민족'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어릴 때부터 혼혈인에 대한 편견을 주입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인 '시민윤리'에는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이다…피를 나눈 동포들에 대한 연대 의식으로서 민족 공동체 의식은 애국심과 비교될 만하다"고 적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국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백인계 혼혈인인 양모(17)양은 "교과서에서 단일민족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이방인으로 낙인찍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평공고 전영록(사회과) 교사는 "현행 교과서는 우리 민족이 한 핏줄인지에 대한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으면서 한민족의 정체성만 강조하고 있다"며 "교과서를 통해 혼혈인도 우리 사회의 당당한 일원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 혼혈 용어 논란='혼혈(混血)'은 '피가 섞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용어부터 차별적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균관대 김통원(사회복지학) 교수는 "순혈(純血)의 반대말인 혼혈은 차이를 나타내기보다는 비하 또는 멸시의 뜻을 내포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에 난 아이들을 일컫는 '코시안(Kosian=Korean+asian)'이란 단어도 부적절한 표현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전북대 설동훈(사회학) 교수는 "'검둥이' 또는 '조센진'등과 같은 차원의 말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근 '혼혈'과 '코시안'을 대체할 새로운 용어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전라북도 교육청은 지난달 공모를 통해 코시안 등 국제결혼 가정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온누리안'을 발표했다. 온 세상을 뜻하는 '온누리'에 영어로 사람을 뜻하는 어미인 'ian'을 붙인 말이다. 혼혈인 단체인 '국제가족한국총연합회'는 '국제가족'이란 표현을 제안하고 있다. 국제결혼의 증가와 함께 혼혈아동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있지만 이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명칭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LG필립스LCD 안양연구소에서 생산장비를 담당하고 있는 미국계 혼혈인 박지수씨(왼쪽)가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박씨는 2004년 펄벅재단의 추천으로 이 회사에 들어갔다. 박씨는 "혼혈인을 똑같은 한국인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학년때부터 문화적 다양성 교육을"
어떤 대책 필요한가

LG필립스LCD 안양연구소는 3년째 혼혈인을 채용하고 있다. 2004년 펄벅재단의 추천을 받아 흑인혼혈 박지수(22)씨를 처음 채용했다. 지난해엔 백인혼혈 김모(22)씨를 고용했다. 올해도 한 명을 추천해 달라고 재단에 의뢰했다.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혼혈인이 머리 좋고 능력이 있어도 취업에서 차별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매년 한 명씩 고용키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혼혈인이 직장 생활에 잘 적응할지 걱정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회사의 중론이라고 한다.

혼혈인에게 취업은 쉽지 않은 관문이다. 혼혈인 지원 단체에선 "소수자 보호 차원에서 혼혈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취업할당제'를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학교를 자퇴하거나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혼혈 청소년을 위한 대책도 시급하다. LG필립스 관계자가 "채용할 혼혈인을 찾으려 해도 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친 혼혈인이 드물어 놀랐다"고 말할 정도로 학교 중도 탈락자가 많다. 펄벅재단은 "중도 탈락자를 위해 검정고시 지원과 대학생 멘토링 등 자활 프로그램을 정부에서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혼혈인을 차별하는 명시적인 법이나 제도는 없다. 문제는 인식이다. 전문가들은 혼혈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선 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성공회대 박경태(사회학) 교수는 "차별과 차이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며 "교과서에 실리는 사진과 그림에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도 나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김통원(사회복지학) 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혼혈인에 대한 차별이 발생하면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대책도 필요하다. 배기철 국제가족총연합회 회장은 "브라질의 '인종차별 금지법'의 경우 인종차별 발언을 하면 수백만원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며 차별 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 특별취재팀 = 이철재.한애란.정강현.김호정 기자, 사진 = 김태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