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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간첩단' 고문수사관, 모르쇠 일관하다 재심 재판 중 구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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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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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 당시 전 국군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고문 수사관인 고병천(79)씨가 지난 2일 피해자들 앞에서 ‘가짜 사과’로 일관하다 법정에서 구속됐다.

고문에 대한 공소시효 만료로 법적 처벌을 피해갔던 그는 지난 2010년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해 “고문을 한 적이 없다”는 위증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이성은 판사는 이날 오후 열린 고씨 재판에서 피고인신문 직후 직권으로 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법정에서 이를 집행했다. 판결 이후가 아닌 재판 도중 판사가 직권으로 피고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고씨는 본인이 누군가에게 잘해준 내용은 기억하면서도 불리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도주 우려와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아 구속영장을 집행하고자 한다”고 영장 발부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억을 해내서 피해자들이 아픈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열쇠는 고씨가 쥐고 있다”며 “아직 피해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사죄가 이뤄지려면 고씨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부연했다.

재판부의 구속영장 발부는 고씨의 계속된 거짓 진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서 김씨는 지난 재판에서부터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의사를 밝혔다. 이 때문에 이날 재판엔 ‘고씨가 사과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입국해 재판을 방청했다. 하지만 정작 고씨는 이날 재판에서 형식적으로 사과하면서도 구체적인 고문 사실 등에 대해선 부인했다.

그는 이날 진행된 피고인신문에서 “실무 수사관이었던 내가 조직을 대표하듯 동료들과 선배들 대신해 사과할 수 없다 생각했고 나에게 돌아올 눈총도 무서웠다”며 “고령의 나이로 쓸데없는 관념으로 사실과 다르게 진술했다. 모든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사전에 준비해온 입장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씨는 이후 피해자들을 대리한 장경욱 변호사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장 변호사는 “이제까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다가 이제는 추상적이고 소극적으로 인정하고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며 고문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수희·이주광·이헌치씨 등 고씨로부터피해를 당했다고 밝힌 피해자들을 거론하며 ‘고문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고씨는 “그 사람은 내가 안 했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의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에 재판부까지 나서 “진정한 사과가 되려면 본인의 행위를 먼저 직시해야 하고 그것을 고해야 한다”며 “사죄라는 건 받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돼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고씨는 끝내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재판부는 5분 동안 휴정을 한 후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법정 내에서 집행을 명령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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