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분수대

잠들지 않는 남도

중앙일보

입력 2018.04.03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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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공산진영과 자유세계가 맞선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가 2008년 제주를 여행하고 이듬해에 쓴 기행문의 한 대목이다. 그의 글이 새겨진 기념비가 올레 1코스 종점인 광치기 해변 근처에 있다. 성산 일출봉이 멋지게 보이는 이곳에서 1948년 집단학살이 있었다. 르클레지오는 “그날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해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마을 사람들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성산 일출봉)”라고 썼다. 일출봉 근처뿐만 아니라 제주 명승지 곳곳에 4·3의 아픔이 서려 있다. ‘오름의 여왕’다랑쉬오름과 함덕 해변 주변의 조천읍 북촌리, 심지어 평화롭고 한적한 사려니숲길에도 4·3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제주 4·3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비극적 사건이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인 2만5000~3만 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4·3이 지나간 후 제주 기혼 여성의 절반이 ‘홀어멍(과부)’이 됐다. 바람, 돌과 함께 여자가 많은 ‘삼다도’ 역시 4·3이 남긴 생채기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4·3의 아픔을 담은 민중가요 ‘잠들지 않는 남도’다. 안치환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보수 정권 공식 행사에서 ‘수모’를 겪다가 이번에 ‘복권’됐다. 오늘 열리는 4·3 70주년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함께 합창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6월 10일까지 열리는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기획전이 남로당 시각에 치우쳤다는 일부 보도를 보고 직접 가봤다. 지나친 해석이다. 남로당 ‘무장대의 호소문’이 크게 걸려 있지만 사료(史料)의 하나로 전시되고 있을 뿐이다. 전시 글 중에는 남로당의 무장봉기는 급진 강경파에 휘둘린 탓이고, 남로당 무장대 지도부의 무책임한 월북으로 제주도민은 정부의 더 강경한 대응에 직면하게 됐다는 비판도 있다.

전시의 기획 의도는 처음과 끝에 잘 나와 있다. 처음은 4·3 추모곡인 최상돈의 ‘애기동백꽃의 노래’다. “남이나 북이나 동이나 서나 한겨레 싸우지 마라”고 한다. 전시 에필로그는 군인과 희생자를 함께 모시는 제주 하귀리의 영모원(英慕園) 추모글에서 따왔다.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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