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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봉기가 빌미 줬지만, 무고한 양민 학살은 국가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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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박명림

박명림

제주4.3 사건이 가리키는 날짜는 1948년 4월 3일이지만 시작은 1947년 3월1일 이른바 ‘관덕정 발포사건’까지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한창이었는데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위대가 강하게 항의하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6명이 숨졌다. 이들은 제주4.3 사건의 첫 희생자로 기록됐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4·3 분석 #“무장대 진압은 정당한 행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제주 4.3사건을 학술적으로 처음 다룬이는 박명림(사진)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다.

박 교수는 제주4.3 사건 배경에 대해 “48년 2월 7일 남로당의 전국적인 선거저지 투쟁(2·7 구국투쟁)이 있었고, 발포사건 이후 육지 병력이 제주도에 투입돼 물리적 긴장감이 높아진 당시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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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사건에 동요한 민심은 3월 10일 제주도 166개 기관이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전남·전북 등 육지에서는 경찰이 제주도로 파견됐다. 우익 토벌대로 활동한 서북청년단도 이때 제주도에 들어왔다.

이런 가운데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 끝에 목숨을 잃자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는 제주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숙소를 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그 가족들, 우익 인사를 무차별 살해했다. 무장대는 김달삼이 이끌었다. 김달삼은 그해 8월 북한으로 도피했다.

박 교수는 “남로당 지도부가 봉기를 주도하고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해 많은 제주민이 피해를 보도록 하는 데 명분과 빌미를 제공한 것은 엄정히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라 말했다. 그는 “군·경의 임무는 국가의 정당한 법적 행위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는 것으로 당시 무장대에 대한 진압은 정당한 행위”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사태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 당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당시 군·경이 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죄다 친북으로 몰아 학살했다. 양민에 대한 학살은 의심의 여지 없이 국가에 의한 범죄”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제주4.3을 폭동이나 반란의 시각에서 다루던 초기 시각을 거쳐 민중항쟁, 지금은 민간인 학살로 바라보고 있다”며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담론들은 서서히 퇴색하고 보편적이고 인도적인 담론들이 더 두드러질 것”이라 말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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