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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sible 한반도] 덩샤오핑과 김정은의 공통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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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북한의 덩샤오핑’이 되고 싶어한다. 중국 베이징에 들락거리던 북한 관리들이 2010년부터 자주 했던 말이다. 김정은이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마친 남측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마친 남측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아울러 평양을 자주 드나드는 유럽 언론인들은 ‘김샤오핑’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김정은과 덩샤오핑(1904~1997)을 합성한 말이다. 평양과 맨해튼을 합성해 ‘평해튼’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10대 시절 유럽에서 시장경제 학습 #덩샤오핑-프랑스, 김정은-스위스 #개혁·개방 시도 같지만 김정은 성과 없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최대 관건

북한 관리들은 왜 김정은이 북한의 덩샤오핑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을 했을까? 그들은 ‘김일성-건국, 김정일-국방, 김정은-경제’라는 프레임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 롤모델로 덩샤오핑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덩샤오핑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덩샤오핑은 16살에 프랑스로 유학 갔다. 중국 정부가 만든 근공검학 프로그램에 합격하면서다. 근공검학은 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즉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의미한다. 덩샤오핑은 5년 동안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현대 국가의 상공업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프랑스에서 서구와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세계, 중국의 지위,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프랑스는 또한 그의 기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평생 커피와 와인, 치즈와 빵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1살의 나이로 그가 프랑스를 떠날 때 확고한 입장을 지닌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가 됐다는 점이다. 덩샤오핑은 1949년 이전까지 한 번도 중국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마오쩌둥(1893~1976) 보다 훨씬 더 넓은 국제적 시야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공산혁명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1959년 모습. [AP=연합]

중국공산혁명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1959년 모습. [AP=연합]

그는 22살 되던 1926년 1월 모스크바로 옮겼다. 덩샤오핑이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지 못한 채 여전히 신경제정책(NEP) 체제에 있었다. NEP는 소농과 소자본가에게도 사회주의 경제가 중공업을 발전시킬 때까지 번창하도록 장려했다. 또한 외국인에게도 소련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체제에서 사기업을 허락하고 외국 투자를 권장하는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제도보다 훨씬 빠른 경제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체제하의 시장경제를 최고지도자로 가는 과정에 적용했다. 49년부터 52년까지 중국 서남부 지역을 담당할 때와 70년대 후반 특구 4곳을 지정할 때 시도했다.

김정은은 12살 때 스위스 베른에서 유럽을 경험했다. 덩샤오핑보다 4살 어린 나이에 유럽을 밟았다. 그리고 4년 동안 그곳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는 덩샤오핑을 걸었던 특구 지정을 따라 2013년부터 중앙급 경제특구 5곳과 지방급 경제개발구 22곳을 선정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처럼 특구를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대북 제재를 풀지 못해서다. 김정은은 남북,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내용으로 합의에 도달할지 모르겠지만, 덩샤오핑이 미·중 수교(1979년)를 한 것처럼 북·미 수교를 논의할 것이다.

10대 시절에 경험했던 덩샤오핑의 프랑스 DNA가 그의 국정철학에 반영됐듯이 김정은의 스위스 DNA도 북한의 미래를 좌우하기를 기대해 본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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