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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과 어른을 위한 놀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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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

집 근처에 괜찮은 테니스장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감싸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의 4개 면짜리 코트였다. 동호회원들과 테니스를 친 후 맥주 한잔하면 하루를 잘 보낸 느낌이었다. 그 테니스장이 지난해 없어졌다. ‘테니스장을 주민보다 외부인이 더 많이 이용한다. 주차장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더니 논란 속에 결국 헐렸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놀이터를 잃은 기분이었다. 인근 고등학교에 있는 테니스장을 대체용으로 구했지만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데다 예전 코트와 비교하면 옹색하기 짝이 없다.

놀이터가 어린이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다. 어쩌면 어른에게 더 필요하다. 돈벌이는 고단한 일이다.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 이렇게 썼다.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직장인에겐 밥벌이의 지겨움을 풀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은 없고 공간은 부족하다. 산은 멀다. 놀이공원이라도 가려면 차는 막힌다. 돈은 돈대로 들고 피곤하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은 생길 듯하다. 주당 68시간이던 법정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준다. 기업 규모에 따라 적용 시기에 차이가 있지만 상당수 직장인에게 시간이 주어진다.

그렇지만 그걸 제대로 즐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집에서 TV·인터넷과 보낼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국민여가활동조사(2016년)를 보면 TV 시청이 46.4%로 압도적 1위다. 이어 ‘인터넷·SNS’(14.4%), ‘게임’(4.9%), ‘산책’(4.3%) 순이다. 개인 취향도 있겠지만 값싸고 편하게 즐길 시설이 없는 탓이 크다. 일하는 시간이 줄면서 수입도 감소하니 돈 드는 활동은 더 하기 힘들 거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2030 스포츠 비전’을 내놨다. 학교체육 활성화, 남북 체육 교류 확대 등을 담고 있는데 내 눈을 끈 건 운동시설 확충이었다. 집이나 직장에서 10분 이내에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 시설을 대폭 늘리겠다는 거다. 2030년까지 추진한다는데 정권이 바뀌어도 잘되길 바란다. 우리의 스포츠 인프라는 열악하다. 체육관은 5만7000명당 한 개, 수영장은 14만 명당 한 개다. 이웃 일본은 1만5000명당 체육관 한 개, 수영장은 2만9000명당 한 개다. 예전 미국 연수 때 살던 동네에는 곳곳에 운동시설이 있었다. 밤 11시까지는 조명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개인의 문제다. 하지만 여가를 위한 인프라를 갖추는 건 정부·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이다. 특히 지자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주민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 주말에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시설·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저녁이 있는 삶’이 된다.

염태정 내셔널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