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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문 대통령, 얼굴 붉히고 언성 높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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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연세대 문정인 교수가 엊그제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행보를 보이면 우리 정부가 중국·미국과 제재위원회에 완화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비핵화에 구체성이 없으면 국제 제재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청개구리식으로 해석했다. 지금은 김정은에게 달콤한 말 한마디보다 진실의 엄중함을 보여줄 때다. 문 교수는 과거 “한·미 동맹이 깨지더라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등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로 우리 사회에 혼란을 주곤 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회담을 준비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문정인 교수의 발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북핵은 한국 협박하고 지배하기 위한 것” #김정은 회담 때 진실만큼 강한 무기 없어

대신 문 대통령은 이른바 진보 정치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의 자존과 이익을 지키는 국가 대표로서 김정은에게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일 각오로 임해야 한다. 2018년 판문점에서 대좌할 두 지도자는 2000년 김대중-김정일, 2007년 노무현-김정일 때와 달리 북한 핵무기를 핵심 의제로 삼게 될 것이다. 앞의 두 만남에서 김정일은 ‘핵 문제는 한국과 관계없다. 미국과 문제’라고 주장해 우리 대통령들이 침묵했다. 이번엔 문 대통령이 확고한 입장을 밝혀야 할 상황이다.

걱정되는 점은 문 대통령의 다소 혼란스러운 북핵 인식이다.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은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것”(2017년 9월 14일, CNN 방송)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위협을 느끼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비핵화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기본 입장”(2018년 1월 10일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북핵을 이해한다는 건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건지 메시지가 모호하다. 모호함은 담판력에 손상을 입힌다.

북한 핵무기는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용이라는 성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성(本性)은 한국을 협박하거나 공격해서 한국인을 지배하고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이다. 1965년 김일성이 함흥군사학원 개원식에서 “또 한 번 조선전쟁이 발발하면 미국과 일본이 개입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미·일을 타격할 미사일을 보유해야 한다”고 한 뒤 핵·미사일 개발이 시작된 역사를 상기해 보자. 김일성에서 김정은까지 대를 이어 북한 지배자들은 한국을 공산화하는 게 목적이었다. 미·일을 겨냥한 핵·미사일 개발은 배후를 차단하는 수단일 뿐이다. 북핵은 대미 방어용 이전에 한국 지배용이다. 한국을 1차 피해자, 미국을 2차 피해자로 규정해야 북핵의 본색이 보인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미국이 걱정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보다 한국의 도시 곳곳을 겨냥하고 있는 단거리 핵미사일을 없애라고 요구해야 한다.

김정은은 평소 “우리의 핵은 민족의 생명이며 통일조선의 국보”(2013년 노동당 전원회의)라고 떠들어댔다. 회담장에서 냉혹한 웃음을 흘리며 “우리의 핵 무력은 민족공동의 전략자산으로 동족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코앞에 있는 손바닥만 한 남조선이나 타고앉자고 핵을 만들었겠나”라고 은근히 협박할 것이다. 그러면 문 대통령은 단호히 낯빛을 바꿔 “핵무기는 1차적으로 대한민국을 겨냥한 흉기다. 우리 국민이 용납 안 한다. 북한 정권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으니 포기하라”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북핵에 맞설 무기로 진실보다 강력한 건 없다. 핵 있는 북한과 핵 없는 한국이 도와가며 오손도손 살 수 있다는 거짓 평화론이 휩쓰는 세태다. 문 대통령이 진실의 힘을 보여주길 바란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