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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가 찍은 북한 핵, 어떻게 거래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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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비핵화 협상

지난 30여년 북한 핵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폭발성이 강한 위험 요소로 작동해왔다. 그동안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합의 등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 듯싶었지만 매번 상호 불신만 키우고 대결 강도를 굳히면서 전쟁 전야와 같은 오늘에 이르렀다. 핵무기 보유국이 되겠다는 북한의 일관된 의지와 노력은 3대에 걸쳐 추진됐다. 그러나 이를 예방하겠다는 국제적 노력, 특히 미국의 대처가 정책 우선순위나 집행에 있어 상황이 필요로 하는 적극성에 한참 못 미쳤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략적 모호성’으로 포장한 애매한 정책으로 북한의 핵프로그램 포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홍구의 퍼스펙티브] #미·중 대결의 냉전 2.0 시대에 #김정은의 전격적 중국 방문은 #동맹이 국가 존망 좌우한다는 #국제 정치의 철칙 일깨워줘 #북한이 비핵화 협상을 통해 #주한미군과 핵우산 철수 노리면 #습관화된 망상으로 대해야 #순조로운 남북 정상회담 위해 #7·4 공동성명과 6·15 합의 등 #소중한 협력 유산 기억해야

이렇듯 국제적 대응이 한계를 보이던 6년 전 권좌에 오른 김정은이 한층 박차를 가한 북한의 핵 보유국 등극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 ‘결단의 시간’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북한은 6차 핵실험뿐 아니라 괌이나 하와이, 나아가 미 본토까지 사정권에 포함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실험에 성공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핵탄두와 장거리 미사일을 갖춤으로써 미국에 결단의 시간을 확실히 통고한 것이다.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전임자들과 달리 단호한 해결책을 보여주겠다고 대선에서부터 공언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서로 ‘임자’를 만나게 된 역사적 드라마의 막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나 김정은을, 무작정 전쟁으로 결판 내겠다는 구시대적 지도자로만 단정할 수 없다. 김정은은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무모함보다는, 오히려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이 미 본토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인의 관심과 우려를 최고점으로 올렸다. 국제 정치라는 시장에서 북한 핵의 흥정 가치를 상한가까지 올리는 데도 성공했다.

반면, 트럼프는 이렇게 상승한 북한 핵과 미사일이 국제 시장에서 상한가를 찍었더라도 바로 그 시점부터 하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고 북한에 주지시켜 협상으로 인도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지속한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전면 제재 전략은 이러한 상황 논리를 반증하고 있다. 김정은의 신년사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 특사 교환은 그러한 상황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상한가까지 오른 자산이라도 현금화 또는 정치·경제적 이득으로 교환하느냐 하는 것은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동상이몽이 더 뚜렷해진 것은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해 달라는 북한의 오랜 주장이 국제 정치의 논리와 현실에 비추어볼 때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북한 핵 문제의 핵심은 ‘동아시아 핵확산’이라는 것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한 채 집단적 혼선으로 이어져 온 결과임을 당사자나 국제사회가 확실히 인정하게 된 것이다. 북한 핵을 공식 인정한다는 것은 NPT, 즉 국제핵확산금지체제의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나 동아시아를 넘어 지구촌 전체를 핵전쟁 공포로 몰아넣을 위험한 수순이다. 핵확산의 가능성이 높은 중동은 물론,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유럽의 핵보유국들도 어렵사리 핵 비확산의 원칙을 지켜가고 있는데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며 새 핵무기 경쟁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동아시아의 경우 북한을 핵 국가로 공식 인정하게 되면 인접 국가들의 핵확산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경우 중국이 일본의 핵 무장을 수용하겠는가. 지난해 한국의 미군 사드(THAAD) 배치에 대한 중국의 극단적 반응을 고려할 때 북핵에 대항하는 한국의 전술핵 재배치 등에 대한 중국의 거부 반응이 얼마나 단호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북핵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거부 입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의 공동 임무를 넘어 강대국의 공동 인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지난해부터 중국이 유엔의 대북 제재에 보다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불편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북한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이 김정은의 머리에도 스쳐 갔을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정적 결론이 널리 수용돼 온 현실도 새로운 대화와 협상 국면 전개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돼왔다. ‘핵 강국 건설’을 반복 강조한 북한의 입장 표명과 선전 활동이 국제사회와 한국 사회에서도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우리 문화에서 자기주장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죽어도 못하겠다’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합의한 북한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 상황 판단에 따라 외골수의 한계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북핵 등 모든 문제를 대화와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입장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며 평가돼야 할 결단이다. 다만 한 가닥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은 강력한 최고 지도자의 결단이라도 북한 체제가 이를 수용하고 추종하는데 문제가 없겠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 체제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일수록 전쟁을 결심하기는 쉬워도 평화로 향한 협상을 선택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독재자에게는 평화의 도래가 무엇보다 큰 위협이라는 논리다. 그러기에 전쟁의 위험보다 평화의 기회를 택하려는 지도자에게는 이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중요하다. 이번 한국 특사들과의 대화에서 김정은이 ‘선대의 유훈’을 비핵화와 연계시킨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달 말로 다가온 남북 정상회담의 순조로운 출발을 위해 지난 반세기 한반도의 분단과 대결 상태를 통합과 협력 관계로 발전시키려고 양측이 함께 만들어냈던 일련의 합의들을 긍정적으로 회고할 필요가 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란 원칙을 함께 천명한 7·4 남북공동성명, ‘하나의 공동체와 두 개의 정부’라는 잠정 체제를 토대로 남북기본합의서, 유엔 동시 가입,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한 1991년의 진전, 이를 뒤따른 6·15 합의와 10·4 합의는 기억돼야 할 소중한 협력 유산들이다. 한반도 안전과 민족 미래를 같이 걱정해온 전통에 따라 남북 두 정상은 급변하는 국제 정치, 특히 강대국 관계의 성격을 확실히 진단하며 각자의 다음 수순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 비핵화의 기본 조건이며 대가로 제시한 미국의 대북 군사 위협 및 경제 제재 중단과 북한 체제 안전 보장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는 4월과 5월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남북, 북·미 협상에서 과거에 이미 합의한 사항들을 재생시키고, 그동안 파탄의 빈번한 원인이 됐던 비핵화 검증 절차의 이행 보장에 대한 대승적 합의도 새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1년 급변한 국제 정치의 방향과 성격 변화에 대해 교섭 당사자들, 특히 남북 지도자들의 인식과 적응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소련이 주도했던 동서 냉전에 이어 세계화가 가져온 변화를 경험한 지구촌은 지난해부터 미·중이 대결하는 이른바 냉전 2.0시대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선언한 중국몽(中國夢)의 실현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약한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는 새 초강대국 패권 경쟁 시대를 열어 놓았다. 이 와중에 위험수위를 훌쩍 넘어선 북한 핵 사태가 방치된다면 세계는 핵전쟁의 가능성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강대국 간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초강대국이 짜놓은 확장억제의 네트워크를 통한 세력 균형으로 예방하는 데 성공했던 동서 냉전 시대 교훈을 중시하게 된다.

한 세대에 걸친 세계화와 국제화의 흐름이 미·중 관계를 최대 교역국으로 묶어 놓은 것은 다행스러운 역사의 진전이다. 미·중은 안전과 번영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두 강대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견인차 구실을 함께 수행할 역사적 임무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한·중·일 세 나라가 사회·문화·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공동체로 향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북한이 비핵화하면서 이에 합류한다면 동북아 4개국의 지역 공동체가 성립돼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더불어 평화와 번영을 위한 아시아 시대를, 미·중 협력 관계의 진전에 따라선 아시아·태평양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남북한이 역사의 갈림길에서 새 시대에 부응하는 적절한 선택을 할 지가 최대 의문이며 과제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핵 있는 평화’로 포장한다든가,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국의 확대억제력 철수와 교환하겠다는 흥정을 시도한다면 습관화된 망상의 재탕으로 취급될 것이다. 한국이 미·중·러·일 주변 4대 강국의 한가운데서 균형 잡힌 중개 외교의 묘수로 국가 안보를 이끌어가겠다는 것도 역시 강대국 패권 정치의 성격을 얕잡아 본 과대 망상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의 성공을 내세워 미국에 ‘결단의 시간’을 통고하였으나 이는 동시에 북한 스스로와 한국도 ‘결단의 시간’으로 몰아넣었다. 냉전 1.0이건 2.0이건 굳건한 동맹의 역할이 모든 당사국의 존망을 좌우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국제 정치의 철칙인 것 같다. 지난주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이 이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홍구 서울대 명예교수·유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