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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한미 협상, 과공(過恭) 말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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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11월21일의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 사실을 보도한 이튿날 중앙일보 1면.

1997년11월21일의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 사실을 보도한 이튿날 중앙일보 1면.

“10위안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1998년 여름 중국 베이징( 北京)의 한 대학교 구내. 기자는 갓 입학한 그 학교 1학년 학생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외환위기의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진학한 대학원의 여름 학기 프로그램 이행을 위해 그 곳을 찾았던 기자는 이른바 푸다오(補導), 즉 개인교습 선생을 구했다. 호구지책으로 중국어라도 배워둘까 해서였다.

교습료로 제시된 금액은 시간당 40~50위안. 절대 수치가 높진 않았다. 문제는 당시 위안화 값이 매우 비쌌다는 점이다. 1997년 10월까지만 해도 달러당 900원대였던 원화 가치는 외환위기 이후 폭락해 1998년 여름에도 1300원대에 머물고 있었다. 반대로 달러화나 달러화에 연동돼 있던 위안화의 상대적 가격은 그 만큼 비싸졌다. “나라가 망했다”는 통사정이 먹혔던지 그 학생들은 교습료를 선뜻 깎아줬고, 덕택에 기자는 서툰 중국어나마 조금 익힐 수 있었다.

한국인에게는 ‘환율 트라우마’가 있다. 외환위기와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환율 급변의 부작용을 온 몸으로 경험했다. 이런 이력을 갖고 있는 한국의 ‘외환시장 선진화 방안’ 추진 소식이 전해지자 우려가 제기된다. 환율 투명성 제고를 위해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 개입 사실을 시차를 두고 공개한다는 게 방안의 핵심이다.

환율 정책은 국가 고유의 권한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미공개 국가가 한국 뿐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나라에는 그 나름의 사정들이 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양대 위기에서 익히 겪었듯이 환율이 급변동하면 ‘혼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방안이 시행되면 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외환당국의 운신의 폭이 크게 좁혀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더욱 마뜩치 않은 건 방안 추진 과정과 경과다.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의와 연계해 외환시장 개입 공개를 결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아직 최종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이미 개입 공개 방침이 결정된 듯 언급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진의도 수상쩍다.

정부 말대로 한미FTA와의 ‘패키지 딜’이 아니라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최대한 환율 운신의 폭을 키우는 쪽으로 적극 협의를 해야 할 것이다. 정부 말대로 최종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상대국 대통령이 공식 타결 선언까지 나온 한미FTA에 대해 “이행을 연기할 수 있다”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터에 우리만 예의를 차리는 건 과공(過恭)에 다름 아닐 것이다.
박진석 경제부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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