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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수 완창판소리 데뷔…판소리계 '프린스'의 탄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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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호 30면

“안녕하세요. 사슴같은 김준수입니다.”

'수궁가', 24일 국립극장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사슴처럼 참하다”는 소개에 얼굴을 붉히며 무대에 오른 김준수는 “지난밤 한숨도 못잤다”며 긴장한 기색이 뚜렷했다. 스물일곱 나이에 200분 동안 ‘원맨쇼’를 펼쳐야 하는 ‘완창판소리’ 데뷔전을 치르게 됐으니 말이다.

김준수는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다. ‘배비장전’ ‘메디아’ ‘흥보씨’ ‘오르페오전’ ‘트로이의 여인들’ 등 주요 작품의 주역을 도맡아 왔고, ‘불후의 명곡’ ‘너의 목소리가 보여’, 드라마 ‘조선미인별전’ 등 방송 출연으로 대중적 인지도도 얻었다. 에스닉 퓨전 그룹 ‘두번째 달’과 춘향가 콜라보 앨범을 내고 장기 콘서트까지 전석매진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국악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얼마전 평창 올림픽 폐막식에선 유럽풍 판소리로 세계인의 흥을 돋웠다.

‘준수한 소리’라는 팬클럽까지 거느린 명실상부 ‘국악계 아이돌’이지만, ‘완창’의 무게감은 달랐을 터. 소리꾼에게 최고 권위라는 34년 전통의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박동진 명창을 비롯해 성창순·박송희·성우향·남해성·송순섭·안숙선·신영희 등 당대 최고 명창들만 올랐던 꿈의 무대기 때문이다. 최근 민은경·유태평양 등 젊은 소리꾼에게도 개방되면서 김준수도 소리꾼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김질하기 위해 꾸준히 도전 의지를 비쳐왔고, 마침내 올해 첫 완창 판소리의 주인공이 됐다. KB하늘극장 400석은 일찌감치 전석매진에 시야 장애석까지 판매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는데, 관객 절반 가량을 20~30대가 차지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그가 선보인 미산제 ‘수궁가’는 상하청 음역대가 넓고 디테일이 섬세한 고난도의 소리로 꼽힌다. 시김새와 애원성이 두드러지고 화려한 기교가 매력이라 여성 명창 중심으로 계승돼 왔지만, 유려한 ‘성골진골’ 성음을 타고난 김준수는 그 본연의 맛을 살려내며 관객들의 귀를 제대로 씻어줬다.

초반에는 다소 뻣뻣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궁에서 화공이 토끼 그리는 대목 즈음해서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앉았다 일어났다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2막 들어선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소리꾼처럼 능청도 곧잘 부렸다. 본인의 킬링파트라는 ‘토끼 잡아 들였소’ 대목에선 이태백 고수의 화려한 자진모리 두드림에 실린 날쌔고 앙칼진 소리의 향연이 흡사 록콘서트의 열기 못지 않았다. 자칭 ‘시골준수’가 ‘시아준수’보다 빛난 순간이었다.

판소리란 ‘빙 둘러감의 미학’이다. 사실 ‘수궁가’는 용왕의 병구완을 위해 잡혀간 토끼가 꾀를 부려 위기를 넘긴다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별주부 어미와 부인의 만류, 날짐승과 길짐승들의 상좌 다툼, 토끼의 세상 자랑, 별주부의 수궁 자랑 등 온갖 에피소드가 새끼를 친다. 바쁜 현대인들이 그럼에도 판소리를 듣는 건 결코 이야기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전통의 스토리텔링 양식의 묘미를 소리꾼이 어떻게 나름대로 살려내는지 그 현장에 동참하며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확인하는 일이다.

실제로 이 무대엔 관객 참여가 5할이었다. 힘들어 보이면 “물 좀 드시오” “고수도 물 좀 따라주시오”라며 관객이 먼저 말을 건넸고, 소리꾼은 시키는 대로 말도 잘 들었다. 특정 역할에 몰입한 배우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청년 소리꾼 김준수였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도 몇 차례 나왔지만, 귀명창들이 먼저 알아채고 훈수를 놓고는 더 큰 박수와 “잘한다”는 추임새도 잊지 않았다. 숨이 차고 땀을 흘리면 관객도 함께 탄식하며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그야말로 무대와 객석이 ‘함께 노는’ 공연이었다.

몇년 전 일본 전통예능 ‘교겐(狂言)’계의 ‘프린스’라 불리는 노무라 만사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정통 교겐 가문의 확고한 계승자이자 주요 공공극장 예술감독에, 영화·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해 국민적 사랑을 받으면서 전통 현대화와 대중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전통 예능인이 본연의 길을 지키는 한편 무한대로 자기 세계를 펼치며 대중스타까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준수의 활약이 이쯤 되니, 이제 우리도 ‘판소리계 프린스’의 탄생을 점쳐 봐도 좋지 않을까. ●

일시: 3월 24일
장소: 국립극장 KB하늘극장
문의: 02-2280-4114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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