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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 변기마다 테이프가 수북 '여공 눈물' 밴 폐공장의 변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3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에 문을 연 '팔복예술공장'. [사진 전주시]

지난 23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에 문을 연 '팔복예술공장'. [사진 전주시]

철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진다. 도로 옆으로 화물 열차가 지나간다.

전북 전주서 문 연 '팔복예술공장' #91년 폐업한 테이프 공장 개조 #작업실·전시장·카페·쉼터 역할 #쟁쟁한 작가 13명 1년간 입주 #백인의 서재·포토존도 운영 #'전환하다' 주제 특별전도

지난 27일 오후 전북 전주시 팔복동 '팔복예술공장'을 둘러싼 풍경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팔복동에 있던 폐공장을 예술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1979년 문을 연 '쏘렉스' 공장이다. 카세트 테이프를 생산하다 카세트가 사라지자 1991년 폐업했다.

폐업한 테이프 공장을 개조해 만든 '팔복예술공장' 전경. 전주=김준희 기자

폐업한 테이프 공장을 개조해 만든 '팔복예술공장' 전경. 전주=김준희 기자

27년간 가동이 멈춘 공장 건물 세 동을 전주시가 사들여 전주문화재단과 손잡고 지난 23일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주민조차 가기를 꺼리던 폐허가 예술인들의 창작공간 겸 시민들을 위한 예술교육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국비와 시비 등 50억원이 들어갔다.

팔복예술공장 한 켠에 서 있는 굴뚝. 세로로 '(株)쏘렉스'라고 적혀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한 켠에 서 있는 굴뚝. 세로로 '(株)쏘렉스'라고 적혀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어귀에 있는 굴뚝에는 세로로 '(株)쏘렉스'라는 빛바랜 글씨가 남아 있다.

박방영 작가가 팔복예술공장 외벽 철제 문에 그린 벽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상형문자로 표현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박방영 작가가 팔복예술공장 외벽 철제 문에 그린 벽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상형문자로 표현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건물과 건물 사이는 중고 컨테이너 박스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 구실을 한다. 예술가 입주 공간과 전시장·카페·아트숍이 들어선 건물은 A동, 전주시가 20억원을 추가해 예술교육 공간으로 꾸밀 건물은 B동이라 불린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선 '백인의 서재'. 예술가들이 꼽은 '인생 책'이 전시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고 김광석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 전주=김준희 기자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선 '백인의 서재'. 예술가들이 꼽은 '인생 책'이 전시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흑백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 전주=김준희 기자

한민욱 팔복예술공장 팀장은 "애초 A동과 B동 사이가 멀어 공간이 휑했는데 컨테이너 박스로 연결하니 비용도 적게 들고 외형적으로도 힘 있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1층 컨테이너 박스에는 예술가들이 꼽은 인생 책을 전시하는 '백인의 서재'와 흑백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전날 작업실에서 밤을 샜다는 박두리(29·여) 작가는 "작업실 공간이 넓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박 작가는 팔복예술공장이 공모를 통해 뽑은 입주 작가 13명 중 1명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박 작가는 "서울에서 여러 작가들과 쓰던 공동 작업실은 책상 하나 겨우 놓을 정도로 좁았다"고 회상했다.

이달 초 팔복예술공장에 입주한 박두리(29) 작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이달 초 팔복예술공장에 입주한 박두리(29) 작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박 작가는 "미술학원 강사 등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세와 작업실 비용 대기에도 빠듯했다"고 했다. 그는 "신진 작가들에게는 갤러리에서 전시 공간을 빌려 주는 것도 감지덕지다. 팔복예술공장은 작업실이 5평(16㎡) 정도로 널찍한 데다 전시장과 휴게 공간까지 갖춰 다른 레지던시보다 인기가 높다"고 전했다.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은 예술가들에게 일정 기간 거주·전시 공간 및 작업실을 지원하는 사업을 말한다.

실제 이번 입주 작가 공모에는 작가 77명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19~45세인 입주 작가 13명 중에는 프랑스·대만 출신 작가 2명도 포함됐다. 작가들은 내년 2월까지 1년간 이곳에서 창작 활동을 한다.

'공동체 미술'을 추구하는 조동희(34) 작가가 체스를 기반으로 한 옐로 게임을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공동체 미술'을 추구하는 조동희(34) 작가가 체스를 기반으로 한 옐로 게임을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조동희(34) 작가는 본인을 "공동체 미술(community art) 작가"라고 소개했다. 공동체 미술은 화랑이나 무대를 벗어나 사회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예술 활동을 일컫는다.

조 작가는 관객과 체스를 둔다. 보드게임을 기반으로 한 '옐로 게임 만들기 프로젝트'다.

조동희(34) 작가가 야외에서 체스를 기반으로 한 옐로 게임을 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조동희(34) 작가가 야외에서 체스를 기반으로 한 옐로 게임을 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그는 "체스 규칙을 '졸(pawn)로만 왕(king)을 잡는다'는 식으로 바꿔 현실 사회의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곱씹어 보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팔복예술공장에는 쏘렉스 노동자들과 팔복동 주민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기록도 전시되고 있다. 주민 10명은 아예 이곳에서 일한다. 카페 '써니'에서 일하는 바리스타 5명, 해설사 4명, 환경관리인 1명 등이다.

카페 '써니' 주방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 모두 팔복동 주민이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의 카페 '써니' 안에 있는 아트숍에서 조각가 김성균(46)씨가 본인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한민욱 팔복예술공장 팀장이 박방영 작가가 그린 벽화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커피를 만드는 이희정(56·여)씨는 "공장만 있던 팔복동에 이런 명소가 생겨 활기가 생겼다"며 "오늘도 점심시간에 건너편 공장에서 직원들이 몰려와 커피를 마시고 갔다"고 전했다.

팔복예술공장에 전시된 옛 쏘렉스 공장 자료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동 산업단지 노동자와 주민들의 삶을 다룬 '팔복덕방 프로젝트'.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에 전시된 옛 쏘렉스 공장 자료들. 전주=김준희 기자

카페 안에 마련된 아트숍에선 지역 작가들이 만든 소품을 판다. 조각가 김성균(46·여)씨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팔복예술공장은 오는 5월 7일까지 'Transform:[  ]전환하다' 주제로 특별전을 연다. 입주 작가를 포함해 26개 팀, 3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유진숙(41·여) 작가는 화장실 변기마다 카세트 테이프 부속물을 수북이 쌓아 놨다. '하루'라는 작품이다. 한때 쏘렉스 공장 여공은 400명에 달했지만 여직원용 변기는 건물에 고작 4개뿐었다고 한다. 이 탓에 여자 화장실 앞은 하루 종일 긴 줄이 늘어섰는데 유 작가가 이를 모티브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팔복예술공장 특별전에 출품한 유진숙(41·여) 작가 작품.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특별전에 출품한 유진숙(41·여) 작가의 작품 '하루'. 변기마다 테이프 부속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 과거 쏘렉스 공장엔 400명의 여공이 있었지만 건물에 변기는 겨우 4개뿐이어서 여자 화장실 앞은 종일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특별전에 출품한 유진숙(41·여) 작가의 작품 '하루'. 변기마다 테이프 부속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 과거 쏘렉스 공장엔 400명의 여공이 있었지만 건물에 변기는 겨우 4개뿐이어서 여자 화장실 앞은 종일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특별전에 출품한 유진숙(41·여) 작가의 작품 '하루'. 변기마다 테이프 부속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 과거 쏘렉스 공장엔 400명의 여공이 있었지만 건물에 변기는 겨우 4개뿐이어서 여자 화장실 앞은 종일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전주=김준희 기자

특별전에선 팔복예술공장이 지난해 시범 운영한 '창작예술학교 AA(Art Adapter)' 출신 작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초대 교장은 설치미술가 전수천(71)씨였다. 팔복예술공장 측은 "학교명은 바뀌더라도 '예술가를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은 그대로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관객 황모(49·전주시 평화동)씨는 "주변에는 주로 노동자들이 사는데 그들이 퇴근하는 시간엔 정작 팔복예술공장은 문을 닫는다"며 "전시 시간(오전 10시~오후 6시)과 주민들의 생활 패턴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팔복예술공장 주간 조감도. [사진 전주시]

팔복예술공장 야간 조감도. [사진 전주시]
지난 23일 팔복예술공장 개관식에서 김승수 전주시장(가운데) 등 참석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전주시]
김승수 전주시장(사진 왼쪽) 등 관객들이 팔복예술공장에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전주시]

김승수 전주시장은 "팔복예술공장은 전주 전체를 '문화특별시'로 만드는 핵심 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Transform:[ ]전환하다' 주제로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 전시된 영상 작품. 전주=김준희 기자

'Transform:[ ]전환하다' 주제로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 전시된 영상 작품. 전주=김준희 기자
팔복예술공장 특별전에 전시된 작품. 1991년 폐업한 공장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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