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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원 포인트 개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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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미국이라고 정치 보복과 진영 논리가 없는 게 아니다. 오바마는 부시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판하며 철군했다. 트럼프는 오바마케어 폐지를 위해 뛰고 있다. 존 볼턴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자마자 미 언론들은 ‘오바마 인맥의 대청소’가 시작될 거란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 대통령제 비극 끝내자면 #제왕적 인사권 축소가 입구다

그래도 넘지 않는 선이 있다. 대선 TV토론 때 트럼프는 힐러리에게 “내가 당선되면 당신은 감옥에 갈 것”이라며 e메일 스캔들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직후 행사장에서 ‘구속하라(Lock her up)’는 구호가 나오자 “이젠 잊어버리자”고 다독였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4명이나 구속됐다.

물론 범죄 혐의의 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질 차이를 부른 토양을 따지고 보면 왕과 다를 게 없는 한국 대통령의 인사권이 출발점이다. 정책이라면 우리 대통령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제왕적이라 불리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의 총리 후보는 줄줄이 낙마했다. 여소야대 국회에선 국가 대소사의 결재권자가 야당 대표다.

인사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줄잡아 2000개가 넘는 자리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데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국정원장·검찰총장·국세청장 등 권력기관장의 임명과 해임에 대통령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다. 국회 인사청문 절차를 거치지만 대통령은 결과에 따를 의무가 없다.

얼마나 제왕적인지는 ‘유시민(유명 대학, 시민단체, 민주당)’으로 불린 친문 순혈주의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만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편이면 영어를 못해도 대사로 내보내고 주요국 대사라도 적폐로 분류되면 임기 중에 불러들이는 막강 인사권이다. 사법부도 방송사도 어슷비슷하다. 이전 정부에선 고소영, 성시경 인사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장관 등 주요 공직자에 대한 인사권을 대통령과 의회가 공유하도록 헌법을 만들었다. 대통령은 지명권을 행사하고 상원은 인준권을 갖는다. 대상 직위가 대략 1200개를 넘는데 청문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자리만 600개에 달한다. 권력기관장은 당연히 포함된다.

대충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연방 대법관의 경우 네 명 중 한 명이 거부되거나 철회됐다. 힐러리는 미 국무장관 인준청문회에서 1562개 항목에 자료 제출과 질의응답을 했다. 우린 60명 남짓에, 그것도 표결을 하지 않는 무늬만의 청문회가 대부분이다.

대통령 단임제냐 4년 연임제냐는 건 권력구조의 본질이 아니다. 왕이 없는 나라에선 대통령을 둔다. 대통령 임기는 정하기 나름이다.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의 여야 논쟁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대통령제가 문제일 때 중요한 이슈다.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이 예외 없이 제왕적 대통령인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이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적절하게 통제받고 있느냐는 거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은 견제 장치가 여전히 희미한 제왕적 대통령제다. 야당이 주장하는 ‘외치 대통령, 내치 총리’도 현실에선 영역 갈등의 혼란을 부를 게 뻔하다. ‘문재인 대통령에 홍준표 총리’ 같은 조합이 얼마나 잘 굴러갈까.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지만 막상 권좌에 오르면 자리는 버거웠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거나 ‘살아보니 청와대가 감옥이더라’는 한숨까지 쉰 대통령이 있었다. 국회와의 권력 나누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개헌의 입구이자 출구다.

대통령 취임사에선 제왕적 권력을 나누겠다고 다짐해 놓고 힘을 뺀 거라곤 없는 개헌안이라면 설득력을 잃는다. 살아 있는 권력엔 충견이 되고 권력이 힘을 잃은 뒤엔 물어뜯는 권력기관을 바꿀 수도 없다. 지금 정권도 언젠가는 권력을 놓는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