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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개헌 논의의 몇 가지 수수께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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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이번 주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 발의로 본격적인 막이 오른 개헌 국면은 몇 가지의 심각한 정치적 수수께끼들을 던진다. 정치를 취미로 생각하건, 그것이 삶의 희비를 가른다고 생각하건 그 수수께끼들은 매우 복잡하고 낯설며, 어쩌면 한국 현대 정치의 비밀을 알려 줄 해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소야대 속에 대통령 발의 개헌? #권력 분산 대가로 제왕적 총리나 #다수의 제왕 모시는 것은 아닌지? #제왕적 대통령보다 우리 내부의 #권위주의가 더 문제는 아니었나? #6월까지 이 의문들 풀 수 있을까?

그 첫 번째는 우선 개헌안이 대통령에 의해 왜 발의됐는가 하는 매우 근본적인 수수께끼. 순수하게 정치공학적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대통령이 개헌안을 선제적으로 발의한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역대 그 어느 정권도 집권 초기, 어떤 의미에서는 권력자원이 최정점에 이르렀을 때 개헌 논의를 자발적으로 시작한 적이 없다. “개헌은 권력의 블랙홀”이라는 정치권의 오랜 잠언처럼 정국 주도권을 잠식할 개헌 논의는 모든 정권 초기의 금칙어였다. 반대로 노무현 정부가 그랬고 박근혜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정부가 개헌 논의를 꺼내 든 것은 임기 후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였고, 바로 그래서 언제나 실패했다.

제1야당이 116석을 점유하고 있는 국회에서 표결로 부쳐져 재적 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폐기될 운명의 개헌안을 대통령이 발의한 것이 그래서 더 놀랍다. 남북 정상회담 등의 주요 의제가 눈앞에 있는 지금 굳이 개헌 논의로 전선을 확대하는 것은 정치적 타산이 맞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대통령 개헌안이 단기적인 정치적 고려로 던져진 것은 아니라는 가장 간단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청와대 참모들의 건의와 무관하게 대통령이 개헌 공약을 지키려는 의지가 매우 강력하다는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다.

개헌과 관련된 두 번째 수수께끼는 이제는 유행어가 돼 버린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말 우리 정치사 불행의 기원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예외 없이 측근 비리와 불행한 결말을 맞고, 최근 1년 동안 전임 대통령이 2명이나 구속되는 정치적 비극의 원인으로 누구나 대통령 독주의 헌정질서를 당연히 꼽게 된 것 같다. 대통령 발의안 역시 그 실질적 내용과 무관하게 상당히 대통령 권한이 약화된 안이라 소개됐고 국회, 특히 야당은 내각에 대한 통제권을 상당히 국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박원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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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것이 심각한 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통치권이 분산될수록 리더십과 정치적 책임 또한 분산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야당일 때는 견제를 주장하고 여당일 때는 정책 연속성과 안정성을 주장하는 역설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통치권이 견제될수록 누가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견제자 또한 견제돼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고 있다. 적어도 내각제에서는 불신임, 의회 해산과 재선거라는 과정이 있지만 이원정부제에서 국회가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개헌과 관련된 세 번째 수수께끼는 정말 대통령제의 제왕적 운용이 개헌을 통해 바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 대통령들의 ‘제왕성’은 정말 헌법에 기인하는가, 혹시 그 ‘제왕성’은 ‘대권’과 ‘잠룡’을 운위하는 우리의 문화나 상명하복의 관행에 각인돼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전 대통령들의 비리와 범법이 정말 대통령 중심제인 현행 헌정질서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사적 이너 서클을 통해 내리는 실질적인 정책 결정들을 장관들이 고개 숙여 받아 적고 무조건적으로 실행하는 문화와 관행에서 기인한 것인지 정말 우리가 심각하게 토론한 적이 있었던가.

물론 문화와 관행을 바꾸는 일, 우리 안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일에 비하면 개헌을 통해 모든 것을 일거에 헤집고 바꾸려는 시도는 손쉽고 간단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소한 제도 변화라도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를 자아내는 법이니, 제왕적 대통령 대신 제왕적 총리나 다수의 제왕을 모시게 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불확실성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새로운 헌법을 상상하고 더 좋은 정치를 언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과제가 이제 우리 앞에 던져졌다는 사실이다. 권력구조뿐 아니라 국민기본권과 지방분권,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들을 성찰할 임무가 싫건 좋건 주어진 셈이다. 그 여정이 이번 6월에 끝나는 짧은 여정일지는 물론 또 다른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