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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돌아온 포스트잇…“성범죄 교수 방 빼라”

중앙일보

입력

“성범죄자에게 배울 것은 없습니다”“잠시나마 당신을 존경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미투' 피해자 지지·가해자 처벌 요구하는 의사표현

28일 오후 덕성여대 인문사회과학대학 3층 복도. 학생들이 오고 가는 교수 연구실 앞에 형형색색의 메모지 ‘포스트잇’이 붙었다. 방문에서부터 복도까지 뒤덮어버린 포스트잇에는 교수를 향한 수백장의 비난 문구가 담겼다. ‘성폭력은 예술이 아니다’‘당신한테 배운 시간이 아깝습니다. 사죄하십시오’ ‘이 싸움의 끝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닮아있을 것입니다’ 등의 내용이 적혔다. 최근 이 학교에서 지도교수들이 성폭력·성추행 의혹에 휩싸이면서 이틀 전부터 학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28일 오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덕성여대 독문과 조모 교수 연구실 앞에 붙은 학생들의 항의 포스트잇. 정진호 기자

28일 오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덕성여대 독문과 조모 교수 연구실 앞에 붙은 학생들의 항의 포스트잇. 정진호 기자

대학교 내에서 교수들의 성추문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강력한 처벌과 대응책을 요구하는 ‘포스트잇’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피해 여성을 추모하고 연대하기 위해 붙었던 포스트잇이 ‘미투’와 ‘위드유’ 운동의 상징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포스트잇 퍼포먼스가 시작되거나 예정된 학교는 이화여대, 덕성여대, 부산대, 성신여대 등이다.

28일 오후 대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입건된 덕성여대 국문과 최모 교수 연구실 앞에는 학생들의 포스트잇과 대자보가 도배돼있다. 정진호 기자

28일 오후 대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입건된 덕성여대 국문과 최모 교수 연구실 앞에는 학생들의 포스트잇과 대자보가 도배돼있다. 정진호 기자

미투·위드유 운동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포스트잇이 등장한 곳은 이화여대다. 지난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관혁악과 송모 교수와 조소과 김모 교수의 연구실 앞에 성추문 교수의 사퇴를 촉구하고 학교 당국을 비판하는 포스트잇 수백장을 붙였다. “학생들의 꿈을 이용하지 마세요”“사람 말고 악기를 만지세요”“우리가 증인이자 증거이며 목격자” 등의 내용이었다. 나흘 뒤 부산대 학생들도 성추문이 일어난 한문학과 이모 교수의 퇴진을 촉구하며 포스트잇을 도배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지난 23일 이화여대에서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연구실 앞에서 시작된 포스트잇 퍼포먼스. 권유진 기자

지난 23일 이화여대에서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연구실 앞에서 시작된 포스트잇 퍼포먼스. 권유진 기자

미투 운동 이후에만 3명의 교수가 성추문에 휩싸인 덕성여대는 포스트잇이 가장 활발한 곳이다. 지난 8일 덕성여대 페이스북 익명 커뮤니티인 대나무숲에는 독어독문학과 조모 교수가 9년 전 빈 강의실에서 볼과 허벅지를 쓰다듬었다는 익명 제보가 올라왔다. 이어 지난 20일에는 교내 커뮤니티에 서양학과 김모 교수로부터 7년 전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앞서 국어국문학과 최모 교수는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입건된 사실도 알려졌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 연구실를 비난 하는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 정진호 기자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 연구실를 비난 하는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 정진호 기자

학생들은 포스트잇이 용기를 낸 피해자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학 사회에 만연한 성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해자에 대한 처벌 뿐만 아니라 2차 피해 방지 대책을 수립을 촉구한다는 설명이다. 덕성여대 IT 미디어공학과 김민진(21)씨는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던 피해자들과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영어영문학과 이모(22)씨는 “오프라인에서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의사를 표현해야 다른 교수들이나 학교도 경각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포스트잇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일종의 저항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고 진단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수막, 대자보 같은 수단은 대의를 모아 소수 인원이 대표해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면 포스트잇은 개개인이 직접 다양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이라며 “특히 행동에 동참하는 사람의 수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비난이나 비판의 대상은 더 압박감 느끼고 수치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28일 오후 덕성여대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 연구실 앞에 한 학생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정진호 기자

28일 오후 덕성여대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 연구실 앞에 한 학생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정진호 기자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익명을 전제로 한 포스트잇이 이어지는 건 여성에 대한 폭력 행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라면서 “미투나 위드유에 나서는 여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면서 투쟁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 있다. 포스트잇은 이를 배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규진·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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