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중국 선전(深圳)시의 난팡(南方)과학기술대를 방문한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두 번 놀랐다고 했다. 첫 번째는 7년밖에 안 된 대학의 학생 1인당 교육 투자비가 10만 달러, 외국인 교수 정착 지원비가 100만 달러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두 번째는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합작해 1200병상 규모의 연구병원을 세우고 있다. 2년 뒤에 꼭 다시 와 둘러보라”는 천스이 총장의 제안이었다. 그는 미국 로스 앨러모스 국립핵연구소 출신으로 중국의 극초음속 비행체(HGV)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 총장은 “중국이 세계적인 과학자와 명문대를 불러들여 특성화 대학에 날개를 달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 과잉인데 대통령 공약 매달려 설립 기정사실화 #글로벌화 못 하면 시골 대학 전락 … 신설이 타당할까
우리나라에는 난팡과기대보다 훨씬 앞서 문을 연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이 5개 있다. KAIST(1971년)와 포스텍(1987년), GIST(광주과학기술원, 1995년), UNIST(울산과학기술원, 2009년),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2011년)다. 포스텍만 사립이고 4곳은 정부 출연 연구대학이다. 5곳의 학부생 입학 정원은 1850여 명으로 과학·영재고 출신 60%가 입학한다. 그런데도 우물 안 개구리다. 신성철 KAIST 총장은 “세계 10위권 진입의 가장 큰 장벽은 글로벌화”라며 “현재 8%인 외국인 교수 비율을 30%까지 높이도록 정부가 물꼬를 터 줘야 한다”고 말한다. 난팡과기대처럼 정부의 파격 지원이 없으면 글로벌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성화 사립대가 하나 더 생길 모양이다. 한국전력이 오는 2022년 개교를 목표로 전남·광주지역에 세우려는 한전공과대(KEPCO Tech, 켑코텍)다. 탈원전에 맞춰 세계적인 에너지 특화대학을 호남권에 세워 충청권의 KAIST와 영남권의 포스텍처럼 키우겠다는 것이다. 한전은 최근 설립 마스터플랜 용역 사업자를 선정하고 오는 11월까지 계획안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광주·나주·순천·목포의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너도나도 유치 공약을 남발한다.
여기서 우려가 나온다. 한전공대 설립이 한전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정치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전남도지사 시절인 지난해 지역 대선 공약으로 건의해 문재인 대통령이 수용했다.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된 연유다. 덩치도 크다. 150만㎡(약 45만평) 부지에 5000억원(잠정)을 투입한다. 예상 부지 면적이 KAIST 본원(115만㎡)보다 넓고 포스텍(165만㎡)과 맞먹는다.
대학은 넘쳐나고 학생은 급감하는데 과연 옳은 일인가. 한전공대 학부 정원은 100명 안팎이 될듯하다. 그래도 연간 운영비는 최소 1000억원이 필요하다. 한전이 최대 공기업이라지만 안정적으로 재정을 댈 수 있을까. 한전은 지난해 4분기에 1294억원의 적자를 냈다. 2013년 이후 4년 만이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80~90% 선을 유지하던 원전 가동률이 60%대로 뚝 떨어진 탓이다. 장래 경영 상황도 녹록지 않다. 더군다나 정권마다 ‘낙하산’ 사장이 내리꽂힌다. 대학 설립과 운영을 진두지휘할 뚝심 있는 리더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정권 눈치만 볼 게 뻔하다.
과학계에선 “포스텍은 비합리적인 시대에 비합리적인 열정을 가진 지도자(고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으로 탄생했다. 한전에선 제2의 박태준을 기대할 수 없는데 대학의 미래가 있겠느냐”고 걱정한다. ‘정치’가 대학을 세우면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국 대학에는 에너지 관련 학과도 많다. 23년간 탄탄히 자리 잡은 광주의 GIST(입학 정원 200명)만 보더라도 관련 연구가 활발하다. 새로 건물 짓고, 교수 영입하고, 입시 전쟁 치를 게 아니라 GIST를 확대하는 게 더 효율적이란 제안이 나온다. 애초부터 글로벌화로 치고 나가지 못하면 경쟁력 없는 시골 대학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5000억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정부가 4개 특성화 대학에 매년 지원하는 액수보다도 많다. 그 돈이면 똘똘한 대학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