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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만만한 게 한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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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무역 전쟁은 힘으로 말한다. 상대가 약하면 짓밟고 강하면 꼬리를 내린다. 중국이 전형적이다. 2000년 한·중 마늘분쟁 땐 어땠나. 한국이 연 1000만 달러의 중국산 마늘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하자 몇 십 배로 보복했다. 연 6억7000만 달러에 달하는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전면 중단했다. 규범·절차 무시, 협상조차 거부한 중국에 한국은 결국 백기 투항했다.

미·중 싸움에 희생양 될라 #경제 맷집 서둘러 키워야

미국엔 달랐다. 2009년 오바마 정부가 연 17억 달러의 중국산 타이어에 처음으로 세이프가드를 발동했을 때, 중국 상무부는 미국 국내법과 절차에 따라 대응했다. 중국고무공업협회는 “(미국산) 농산물과 자동차에 (중국 정부가) 보복 관세를 물려야 한다”고 했지만, 말뿐으로 끝났다.

중국은 미국의 보호무역에 트라우마가 있다. 멀게는 뉴딜 정책을 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스벨트는 미국 시장에 빗장을 치면서 잠시 금본위 정책을 포기했다. 그러자 국제 은값이 뛰고 중국 은화값도 급등했다. 지금으로 치면 위안화 가치가 크게 오른 셈이다. 그 바람에 1934년 중국의 상품 수출은 3년 전에 비해 3분의 1토막이 났다. 농업 생산액은 47%가 줄었다. 중국 경제가 거의 궤멸에 가까운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의 중국이 “눈빛을 감추고 힘을 키운다(韜光養晦)”거나 『화폐전쟁』의 쑹훙빙을 비롯, 수많은 중국 경제학자가 자나 깨나 달러의 습격을 걱정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중국은 맷집부터 키웠다. 금융 시장의 빗장은 단단히 걸어 잠갔으며 외화보유액을 세계 최대로 늘렸다. 무엇보다 수출 비중을 확 줄이고 내수로 돌아가는 경제를 만들어낸 게 컸다. 2007년 국내총생산(GDP)의 35%에 달하던 수출 비중은 지난해 19%로 떨어졌다. 그 결과 영국의 한 연구소는 미국의 관세 폭탄이 다 터지더라도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0.1% 하락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맷집이 커지자 ‘황제 시진핑’의 중국은 달라졌다. 몸을 낮추는 대신 “떨쳐 일어나 이뤄낸다(奮發有爲)”를 말하기 시작했다. 시진핑은 지난해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이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쓴 열매를 삼킬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며 미국을 정조준했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500억 달러 관세 폭탄에 곧바로 30억 달러의 보복관세로 맞섰다. 대두 수입 제한, 달러 매각 같은 양패구상(兩敗俱傷)의 패도 슬쩍 내비쳤다.

효과는 있었다. 미국 정치권이 움직였다. 매파 윌버 로스 상무장관이 뒤로 빠지고 상대적 온건파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결말을 예상하긴 이르다. 무역 전쟁은 본질이 내부용이다.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트럼프는 중간 선거 승리가 급하고 시진핑은 ‘황제 권력’을 굳혀야 한다. 중간중간 어떤 암초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극적인 타협도, 어처구니없는 파국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진짜 걱정은 우리다. 미·중 싸움에 유탄은 한국이 맞을 판이다. 중국은 한국산 반도체 수입을 줄이고 미국 것을 늘리겠다며 미국과 흥정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한국을 만만히 봤으면 그럴까. 그렇다고 한탄만 할 때가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중국처럼 맷집부터 키워야 한다. 수출 비중을 줄이고 내수를 확 키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한국의 GDP 대비 내수 비중은 OECD 최저 수준이다. 수출 비중은 지난해 43%로 10년 새 되레 커졌다. 내수를 키우려면 생산성을 높이고 규제를 풀어 기업을 뛰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다. “노동이 먼저”라며 있는 기업도 밖으로 쫓아내는 판이다. 정말 이래도 될 때인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