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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점진적·동시적 조치' 속뜻 "리비아처럼 무릎 안꿇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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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고 28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마련한 연회에 참석해 시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고 28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 위원장이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마련한 연회에 참석해 시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중이 정상회담을 통해 ‘점진적·동시적 조치’를 통한 비핵화 방안에 합의했다. 한·미가 지향하는 일괄타결과는 거리가 있는 방식이다.

중국 신화통신은 28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26일 회담 소식을 전하며 김정은이 “선대의 유훈에 따라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북한 측 발표에는 핵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김정은은 25~28일 부인 이설주와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정상회담 뒤 양국 발표에 차이가 나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지만, 상대국이 암묵적으로라도 동의한 내용만 발표하는 것이 관례다. 중국 측 발표로 미뤄 북·중 정상 간에 비핵화 문제에 대한 큰 틀에서의 의견 일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남한과 미국이 우리의 노력에 선의로 응하고, 평화 실현을 위한 계단성·동보적 조치(阶段性、同步的措施)를 취하면서 평화와 안정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계단성·동보적 조치를 신화통신 영문판은 점진적·동시적 조치(progressive and synchronous measures)로 표현했다. 관련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점진적 조치라는 것은 미국의 속도전, 일괄타결 시도와 다른 뜻으로 보인다”며 “북한은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미국과 협상을 통해 선(先)핵포기 후(後)보상에 합의한 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을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마음에 품어왔다. 최근 미국이 리비아식 핵해법을 거론하자 그런 식으로 무릎 꿇을 생각은 없다고 거부 의사를 밝힌 셈”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의 이런 인식은 미국 입장과는 다르다. 최근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비핵화 방식 논의에 빨리 도달할수록, 즉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수록 좋다”(25일), “북한이 회담에서 리비아처럼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시간 벌기용 위장일 뿐”(23일)이라고 말했다. 한국 역시 포괄적 해법을 선호해 왔다. “(복잡한 매듭을 단숨에 자르는)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리는 방식”(14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까지 거론했다.
비핵화 과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 단계마다 방법과 보상을 협의하다 협상판 자체가 깨지면서 북한에 핵을 개발할 시간만 벌어준 과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이런 '살라미 전술'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과거의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게재한 사진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측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게재한 사진에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측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동시적 조치’는 9·19 공동성명에 포함된 ‘행동 대 행동’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북한이 비핵화 관련 조치를 취하는 것과 한·미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안보적 보상을 내놓는 것이 동시에 이뤄져야지, 핵부터 포기하고 보상을 미뤄선 안 된다는 뜻이다.

김정은은 또 ‘한·미의 평화·안정 분위기 조성’도 비핵화 문제 해결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을 통한 군사적 긴장 완화나 주한미군 감축 혹은 철수 요구 등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북·중 정상회담 뒤 중국은 기존의 쌍궤병행(雙軌竝行·비핵화 프로세스와 평화협정 협상 병행)도 다시 부각했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북한을 포함한 관련 각국과 함께 중국이 제시한 쌍궤병행 제안과 각국의 유익한 건의를 합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안정, 지역 및 세계의 장기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선 정전협정 체결국인 중국이 당사자로서 주도권을 쥐고 협상을 이끌 수 있다.
이처럼 비핵화 문제로 사실상 한·미와 각을 세운 김정은은 중국에는 밀착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8일 김정은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연회에서 “중국을 먼저 방문하는 건 마땅한 나의 숭고한 의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김정은이 시 주석의 방북을 초청한 사실을 소개하며 “초청은 쾌히 수락되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뼈 있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28일 오전 6시5분(현지시간) 트위터에 "과거 행정부들은 한반도 비핵화가 가능성조차 없다고 했지만, 이제 김정은이 자국 국민과 인류를를 위해 옳은 일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의 만남을 기대한다"고 올렸고, 11분 뒤 "어제 밤 시 주석으로부터 김정은과의 회담이 잘 됐고, 김정은이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러는 동안, 불행하게도, 최고의 제재와 압박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올렸다.
이와 관련,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중 대 한·미 구도가 다시 형성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북한은 그간 선대의 유훈에 따른 비핵화를 주장하면서도 핵을 개발해왔기 때문에 김정은의 핵 포기 의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비핵화에 있어 한·미 동맹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건들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에 진의를 보다 명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김정은이 제재 완화를 노리고 방중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의식한 듯 제재 이행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루캉 대변인은 "우리는 (비핵화 문제에서)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 의무를 이행하는 뜻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희옥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장은 “김정은이 시 주석을 만난 것 자체가 핵 관련 논의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비핵화의 입구로 들어갔다는 의미는 있다”고 평가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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