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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서남표 전 KAIST총장 “한국 교육으로는 ‘맹자’ 못키워”

중앙일보

입력

5년 만에 처음 KAIST 찾은 서남표 전 총장

대학 교육의 독립성을 강조한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대학 교육의 독립성을 강조한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약 7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하다 2013년 사임했던 서남표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5년 만에 처음으로 KAIST를 방문했다. 지난 20일 열렸던 KAIST 비전 선포식에 초청받은 서남표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기계공학과 명예교수를 중앙일보가 이날 KAIST 학술문화관 콜라보레이션룸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서 명예교수는 총장 재직 시절 ▶테뉴어(tenure·종신재직권) 심사 강화 ▶100% 영어 강의 ▶무시험 입학전형 도입 등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급진적이었다’는 비판론과 ‘정체한 교육계를 혁신했다’는 긍정론이 공존했다. 다만 사임 당시 논란이 된 ‘특허 도용’ 등 쏟아지던 의혹은 대부분 무혐의로 결론 났다.

정부 간섭 안 할수록 대학 경쟁력 향상돼

총장을 사임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교육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여전했다. 특히 대학 교육은 정부 간섭을 받지 말고 대학에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소신을 강력히 피력했다. 서 교수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립과학재단(NSF) 공학 담당 부총재로 4년간 재직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교육 정책의 핵심은 '공공성 강화'다. 경쟁을 강화하기보다는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한다. 이에 대해서 서 교수는 “교육 제도는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지만, 적어도 대학 교육 제도만큼은 경쟁이 필요하다”며 “치열한 경쟁 체계를 도입해야 미국 하버드대·MIT·스탠퍼드대 등 글로벌 선도대학처럼 한국 대학도 국가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 교육 시스템에 경쟁 체계를 접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학에 자율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대학이 글로벌 대학과 경쟁하도록 놔두는 대신 결과를 책임지게 하면, 결국 경쟁력 있는 대학만 살아남는다는 지론이다.

인터뷰하는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인터뷰하는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문제는 정부의 간섭이다. 서 교수 역시 2013년 "교육부로부터 압력을 받고 KAIST 총장직에서 물러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의식한 듯 그는 “정부가 대학 교육에 간섭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확립해야 국부를 창출하는 글로벌 대학을 육성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KAIST 총장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교육부가 한국 대학을 좌지우지하는 배경에는 ‘돈’이 있다고 했다. 대학 재정에서 정부 지원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서, 대학 이사회가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대학의 가장 큰 문제점인 ‘정부 간섭’을 벗어나려면, 대학이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서 교수는 “정부가 교육에 크게 관여하는 유럽 국가는 갈수록 대학 경쟁력이 하락하는 반면, 하버드대(36조원)·MIT(12조원) 등 재정적으로 정부 의존도가 낮은 미국 대학은 경쟁력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물론 대학이 갑자기 재정을 확충하긴 어렵다. 대학은 산학협력·기술사업화를 강화하고, 총장은 기부 유도 등 재정 확충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하는 배경이다.

학내 권력에 집착하는 고참 교수로부터 연구 인력을 풀어주는 것도 한국 대학 제도의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한국 특유의 끈끈하면서 상명하복식 선·후배 관계가 연구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내 권력에 집착하는 ‘패거리 문화’를 없애고 능력 있는 연구자가 마음껏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공공성 강화’ 정책 허점 지적

대학교육뿐만 아니라 중등교육에서도 정부는 '공공성'을 강조한다.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방과 후 학내 영어수업 폐지 정책이 대표적이다. 서 교수는 이 정책에 대해서도 다소 비판적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교육하자는 생각은 무리가 있다”며 “일률적 기준으로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한국은 국부를 창출하는 인재를 키우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 교육의 독립성을 강조한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대학 교육의 독립성을 강조한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그가 제시한 대안은 미국식 교육 제도다. 서 총장에 따르면, 미국은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지자체가 이런 권한을 확보한 건 지방세를 중등교육 재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2조586억원의 재원이 필요한 누리과정(만 3세~5세 무상보육)을 전액 국고 지원하기로 했다.

그는 “소수의 공무원이 생각한 정책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못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다양한 지자체가 자신들의 환경에 적합한 교육제도를 고민하고 적용하면,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성공한 정책과 실패한 정책이 극명히 대비된다. 단기적 혼란은 존재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 지자체가 성공한 지자체의 교육 제도를 벤치마킹하면 결국 교육 시스템이 개선된다는 게 그의 논리다.

KAIST 콜라보레이션룸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KAIST 콜라보레이션룸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또 “맹자의 어머니는 3번이나 이사하면서 아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장소를 직접 선택했다”며 “한국도 자율적 교육 제도를 허락해야 맹모(孟母)가 삼천지교(三遷之敎)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맹자(인재)를 키우려면 교육 시스템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개편하겠다고 나섰다가 번복·유예하는 등 정책이 오락가락한다. 서 교수는 “정권이 바뀐다고 교육 정책이 달라지는 건 문제가 있다”며 “20년 이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교육 제도를 수립하라”고 주문했다.

20년 이상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 정책 수립해야

이런 관점에서 그는 KAIST의 ‘비전 2031’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인터뷰 당일 신성철 KAIST 총장은 “개교 60주년(2031년)까지 교육·연구·기술사업화·국제화·미래전략 등 5개 분야를 혁신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전 세계 대학을 선도할 수 있는 훌륭한 비전”이라며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대학 교육의 과제로는 ‘미래를 위한 연구에 도전하라’는 조언이 남겼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대학이 자동차·석유화학 등 당면한 산업에 필요한 연구를 수행했다면, 이제부터는 기후·식량 등 앞으로 문제가 될 연구를 수행해야 한국 대학이 세계를 선도하고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KAIST ‘비전 2031’ 행사에 초청 받은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KAIST ‘비전 2031’ 행사에 초청 받은 서남표 전 KAIST 총장. 문희철 기자

5년 만에 KAIST를 찾은 서 교수를 구성원들은 따뜻하게 맞았다. 20일 비전 선포식 행사장에서 KAIST 교수들이 줄을 서서 서 교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한 5~6명의 교수는 오후에 본지 인터뷰룸 앞에 몰려들었고, 안병태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무작정 인터뷰 장소에 들어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들은 “돌이켜보면 KAIST에 서 교수 같은 분이 꼭 필요했다”며 “실례인 줄 알지만 (서 교수가) 출국하기 전에 꼭 인사드리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전=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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