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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읽기

봄의 싹틈과 상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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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미세먼지가 연일 말썽이지만 봄은 봄이다. 봄이 활짝 펼쳐지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엔 텃밭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일손이 조금씩 바빠지고 있다. 텃밭 분양을 끝낸 밭에서는 거름을 새로이 하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모종을 시작했다. 작은 땅을 가꾸는 일이지만 장화를 신고 챙이 긴 모자를 쓴 사람들의 행색은 경험이 오랜 농부에 못지않다. 어린아이들도 밭에 나와서 흙을 쌓고, 구멍을 만들고, 물을 뿌리며 논다. 옷에 흙이 묻은 채 기어갈 적에는 땅벌레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햇살 아래 해맑게 웃는다.

봄의 새싹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활기 #자연을 가까이 할 때 긍정적 에너지 얻어

내가 사는 곳에도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풀이 돋고, 과수원의 흙냄새도 맡게 된다. 정현종 시인은 시 ‘파랗게, 땅 전체를’에서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이라고 노래했는데, 그야말로 봄의 풀잎을 보고 있으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되고, 또 괴력과도 같은 생명의 위력을 느끼게도 된다.

나도 여러 해에 걸쳐서 텃밭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다. 열무와 당근, 감자와 고구마, 아욱과 상추와 배추 농사를 지었다. 소출은 썩 좋지 않았지만 행복감은 꽤 있었다. 움트는 것을 돕는 것, 푸른 성장을 돕는 것, 열매를 맺는 것을 돕는 것을 통해서 내가 움트고, 내가 자라고, 내가 열매가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게 텃밭 농사는 단순하게 농작물을 기르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밭을 경작하는 일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밝음과 활력과 자애와 보살핌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일이었다.

나는 작은 땅의 경작을 통해 마음에 많은 것을 얻었다. 이 일은 비록 물질적으로 얻는 것이 사소할지 모르지만 슬픔과 좌절의 늪에 자주 빠지게 되는 우리의 삶에 견주어 보면 상실감에 빠진 마음을 밝게 회복시키는 일인 만큼 그 이익은 상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자연의 성장을 도우면서 우리 마음속에 긍정하는 마음도 함께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사회가 점점 더 도시화가 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자연과는 멀어지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가고, 자연을 활용하는 일 또한 더 많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반려식물을 아파트 내에서 기르는 가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또 식물이 가진 싱그러움을 실내 공간에 활용해서 리듬감과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식물을 활용한 인테리어도 관심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식물을 이용해서 어루만져주는, 식물로 마음을 치유하는 원예치료사도 유망한 직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생긴 문제를 자연을 가까이 데려옴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가 쓴 책 『긍정의 발견』에 따르면 보통의 사람들의 삶에서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비율이 1:1 혹은 2:1에 그치는 반면, 번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3:1 이상을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다른 연구 분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워싱턴대학교 명예교수 존 카트맨이 부부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를 보더라도 번영하는 부부들의 긍정성과 부정성 비율은 5:1에 달했지만, 갈등에 시달리는 부부들은 1:1 미만이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삶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긍정성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데,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가 제시하는 방법은 마음을 열 것, 가까운 자연을 찾을 것, 자신만의 오락거리를 찾을 것 등이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살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마음을 극복하려면 그보다 세 배 이상의 긍정심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에 이란을 방문했을 때 이란 사람들이 새해를 맞으며 준비하는 특별한 음식 가운데 밀싹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설명을 들어보니 밀싹을 준비하는 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여러 날에 걸쳐 직접 기른 밀싹을 준비해 새해의 기도를 올림으로써 자신과 가족들의 새로운 탄생을 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새로 싹튼 밀싹처럼 삶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운을 받아 지난 시간의 깨끗하지 못한 것과 묵은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새로 움트는 봄의 새싹을 보면서 싱싱하고 활달한 생명력의 기운과 신성한 힘을 느끼듯이 말이다. 바닥을 치고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갖기도 하듯이 말이다. 봄의 싹틈을 보면서 마음의 생기와 긍정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일의 상춘(賞春)이 아닐까 한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