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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잔한 아빠의 녹색어머니 교통안전 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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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산업부 차장

최준호 산업부 차장

며칠 전 여느 날처럼 밤 늦게 집에 오니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또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이유도 없이 가슴이 철렁한다. 20년이 넘은 결혼 생활이지만, 해가 갈수록 아내의 표정과 심기 변화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져 간다. ‘공처가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형적인 무뚝뚝 경상도 남자다. 하지만 아이 셋을 두고 직장까지 나가는 아내에게 경상도 스타일을 고집할 용기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녹색어머니회 교통안전 봉사에 가야 하는데 사흘 중 하루는 대신 나가 달라는 ‘지시’였다. 초등학생인 막내의 학교에서 보내온 통지문이었다. 출근길 아침 건널목에서 녹색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어머니’들이 떠올랐다. 곧바로 호기롭게 “안 돼”를 외쳤지만, 1분도 안 돼 정정했다. “어머닌 아니지만…나가지 뭐~. 까짓것 취재하는 셈 치면 되지.” 통지문을 보니 전교 학부모가 연중 3~4차례 참여해야 한다고 돼 있다.

초등학생 자녀의 등굣길 안전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걸 부모가 해야 할까 하는 ‘쪼잔한’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맞벌이 가정이 이미 대세가 된 요즘에 모든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녹색어머니회라니.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18세 미만 자녀를 둔 가구 중 맞벌이 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48.5%에 달한다.

녹색어머니회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사단법인 녹색어머니중앙회’가 정식 명칭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자모 교통 지도반’이 모태였다. 이후 71년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치안본부에서 ‘녹색어머니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정관을 살펴보니 ‘본 회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통안전교육 및 등·하굣길 교통안전봉사를 기본활동으로 한다’고 돼 있다. 정치단체나 유흥업소에 속하지 않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엄격히 심사해 뽑게 돼 있는 자원봉사단체다.

초등학교 시절인 70년대를 기억한다. 한 반에 70명이 수업을 하고도, 오전·오후반이 따로 있었다. 등·하굣길이 아이들로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교통경찰 인력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때였고, 대부분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던 시절이었다.

시대는 변했다. 학생 수는 그때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맞벌이 가정은 일반화됐다. 하지만 자원봉사는 거꾸로 의무가 돼 버렸다. 덕분에 교통봉사를 대신 해주는 ‘알바’까지 생겨났다. 요즘 말로 일자리 창출이다. 학부모가 자녀 등굣길 교통안전을 위해 나서는 걸 누가 뭐라 하겠느냐만, 그걸 경찰청에 등록된 사단법인이 맞벌이를 포함한 모든 부모에게 강제하는 게 맞는 걸까. 교통경찰은 왜 있는 걸까. ‘등굣길이 중요해서 반드시 해야 한다면, 그럼 하굣길은 왜 안 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쪼잔해서일까.

최준호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