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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주주도 외면한 근로자 추천 이사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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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새누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새누리 경제부 기자

이새누리 경제부 기자

지난 23일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가장 큰 관심은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의 사외이사 선임 여부였다. KB노조(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및 KB금융 우리사주조합)가 주주 제안을 통해 추천한 인물이다. 권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노동경제학자다.

KB노조는 지난해 11월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대표를 사외이사를 추천하며 ‘근로자 추천 이사제’ 불씨를 댕겼다. 당시 출석주식 수 가운데 찬성표가 17.78%에 그쳐 부결됐다. 이번엔 정치색이 옅고 전문성이 뚜렷한 인물을 후보로 냈다. 금융권에선 “이번 KB금융 주총은 금융 개혁의 분수령”이란 말까지 나왔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이 샜다. 4.23%만 찬성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근로자 권익을 위해 근로자가 추천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참가하는 근로자 추천 이사제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다. 지난해 11월 찬성표를 던져 ‘친(親)정부’ 의결권 행사라는 논란을 샀던 국민연금(지난해 말 지분율 9.62%)은 이번엔 반대표를 던졌다. 세계적인 의결권 자문사 ISS는 앞서 “KB금융은 (권 교수가 전문인 인적관리보다) 재무나 법 등에서 전문성 보강이 필요하다”고 반대 의견을 권고했다. 외국인 투자자(26일 기준 지분율 69.57%)도 반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 강한 반대는 소액주주 사이에서 쏟아졌다. 주총장에서 자신을 소액주주라고 밝힌 A씨는 “권 교수는 상장사 사외이사 경험이 없어 향후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며 반대했다. KB노조가 ‘관피아’ ‘정피아’를 막기 위해 정관을 바꾸자고 올린 안건 역시 찬성이 4.29%에 그쳤다. 주주 B씨는 “취지는 좋지만, 낙하산이 잘못 해석되면 또 다른 낙하산이 양산될 수 있고 유능한 인재를 역차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 주주와 노조 간 간극은 주총 내내 확인됐다. 검찰이 수사 중인 KB금융 채용비리의혹을 두고 한 노조원이 윤종규 KB금융 회장을 향해 “일선 영업직원이 (의혹 때문에) 욕받이가 되고 있다”고 항의했지만, 주주 C씨는 “안건과 관련 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막아섰다.

근로자 추천 이사제는 ‘근로자 보호냐, 경영권 침해냐’라는 구도로 여전히 갑론을박인 문제다. “기업이 얼마를 벌었는지, 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같은 실적과 주가가 최대 이슈라는 주주 D씨의 말처럼 주주 대부분은 제도의 취지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이번 주총만 보자면 근로자가 추천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참가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새누리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