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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4. ‘냥줍’, 답은 정해졌지만 고민이 필요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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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씨가 나무를 데려가 줄 수 없어요?’

그날 이후, 캣맘 나무맘1님의 제안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울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무가 ‘나의 고양이’가 되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던 중 듣게 된 ‘데려가 달라’는 말은 부탁이 아닌 허락 같았다. ‘나무의 생존을 위해서는 수진씨처럼 경험이 없는 사람의 손길이라도 필요해요’라는.

(4) 냥줍 결심

근데 내가 정말로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일까. 먼저, 나무를 데려와도 되는 이유를 살펴봤다. 직장 생활 2년 차. 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굶기지 않을 만큼 벌고 있었다. 자취방이라는 독립된 공간도 있었다. 뛰어다닐 크기는 못 돼도 캣타워를 설치하면 지낼만 할 것 같았다. 시간은 어떤가. 당시 나는 3교대를 하는 디지털 뉴스팀에 근무했다. 낮과 밤이 수시로 바뀌어 고되긴 하지만, 근무시간이 하루 8시간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한 번 집을 나서면 14~15시간씩 밖에 있어야 했던 사회부 시절과 달랐다. 나무가 집에 적응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오…. 나쁘지 않은데?

그럼 나는 왜 나무를 데려가지 못하고 있나. 가장 큰 이유는 ‘집사 자격’을 검증받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집사의 주머니 사정은 기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다달이 사료와 모랫값만 따지면 넉넉해도, 큰 병에 걸렸을 때 병원비 기준으로는 빠듯할 수 있다. 퇴근 후 최선을 다해 놀아준다고 해도 집을 비우는 동안 고양이가 얼마나 외로워할지는 다 알 수 없다. 신중하게 따져본다고 해도 판단은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만 내릴 수 있다.
‘냥줍(길냥이를 주워다 키움)심사평가원’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냥평원에서는 나에게 “자택 면적 미달에 기초지식 부족입니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고양이 관련 서적 3권에 대한 독후감을 제출하세요”라는 평가를 내릴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요구 조건을 채워 허가 도장을 받아내면 될 일이다. 얼마나 명쾌한가.

물론 그런 기관은 실재하지 않으니 눈 딱 감고 데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조건 외에도 계속 마음이 쓰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무의 빈자리에 대한 걱정이었다. 공원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 중, 나만큼 나무를 아끼는 이가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특히 이 동네 초등학생들에게 나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손을 내밀어 나무를 쓰다듬고는 엄마에게 혼날 걱정을 하는 아이도 봤다. 부모님의 반대로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이 고양이와의 지속적인 교감이 얼마나 큰 의미일까.
나무도 내심 이 생활을 행복해하는 건 아닐까. 내가 한순간에 모든 걸 바꿔버려도 될까. 나무의 의견을 물어볼 수도 없고 딱히 허락받을 곳이 없으니 막막했다. ‘여러분! 나무를 제게 주십시오!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동네에 전단지를 뿌리고 투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밤, 공원 급식소에서 의외의 생명체를 발견했다. 나무가 마시는 물그릇에 열 마리도 넘는 시커먼 민달팽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흙바닥을 기어와 물그릇을 타고 올라가선 풍덩 풍덩. 시각적인 충격은 그렇다 치고 저 물이 나무의 식수라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무는 물그릇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나무맘1님께 문자를 보냈다.

‘나무 물그릇에 달팽이가 너무 많아요! 어떡해야 하죠?ㅠㅠ’

그러나 성과가 없었다.

‘아 그거 날이 어두워지면 그렇더라고요. 어쩔 수가 없어요. ㅠㅠ’

망했다. 나무맘1님도 방법을 모른다니. 고양이 건강에 가장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깨끗한 물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떠다 준 물도 다 얼어붙는 한겨울엔 어떡하지?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병이라도 걸리면? 그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던 나의 걱정꾸러미를 민달팽이가 터뜨려버렸다.
일단 편의점으로 달려가 생수 한 병을 사고 가위로 입구를 잘라 높은 컵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민달팽이 수영장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 나무가 고맙다는 듯 “먀~먀~” 울었다.

며칠 전에 나무맘1님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제 자취방이 너무 좁은데…나무가 답답해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아요.”

나무를 길에서 얼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오래 전 답을 정해놓고 자신을 납득시킬 계기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민달팽이가 나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무에게 평생 깨끗한 물을 챙겨줄 집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부모가 되는 일에 허가증이 필요 없듯이, 누구나 집사가 될 수 있다. 고양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끔찍하게 사랑할 필요는 없다. 육아에 무지하고 어린아이를 딱히 귀여워하지 않는 사람도 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된다. 나도 할 수 있다. 다만 준비가 필요하다. 그날부터 집사로 새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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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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