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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최태원 회장의 이타적 옥중 청년실업 해결 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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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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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제약회사 오너 기업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영업직 사원 모집에 SKY대학 출신들이 몰려들어서 깜짝 놀랐다. S대 경영학과 출신의 응시자에게 ‘정말로 다닐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뽑아만 주시면 뼈를 묻겠습니다’고 해서 한번 더 놀랐다.” 고용 없는 성장 시대의 취업난을 보여 주는 씁쓸한 풍경이다.

최악 실업률 … 한 세대 잃을 수도 #중소기업 가면 3000만원? … 한계 #최 회장의 공채 기득권 포기 주목 #문 대통령, 노동계와 담판하길

청년실업률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최악인 9.9%로 치솟았다. 백약이 무효다. 진짜 무서운 상황은 지금부터 벌어진다. 지난해부터 시작해 2021년까지 베이비붐 에코 세대가 노동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39만 명이 추가로 취업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의 통상적인 경제 성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다”며 “우리 사회는 한 세대를 잃게 될 수도 있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가 중소기업 취업자에게 해마다 최대 1035만원씩 3년간 한시적으로 소득을 보전해 주겠다는 대책을 3월 15일에 내놓아야 했던 배경이다.

3·15 청년일자리 대책에 대해서는 찬성 여론이 우세하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다. 신입이 선배 사원보다 많이 받는 임금 역전, 3년 뒤 지원금이 끊겼을 때 당사자들이 겪을 혼란이 거론된다. 혈세 4조원만 날릴 거라는 독설도 나온다. 하지만 중소기업 중심의 접근법은 바람직하다. 이번 대책은 청년들을 중소기업의 빈 일자리 20만 개로 유도하는 데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고 있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일자리의 대부분은 중소기업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일하는 시간은 긴데 받는 돈은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고 언제 잘리거나 망할지 몰라 청년들이 기피한다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청년들은 고용 절벽에 아우성인데 중소·중견기업들은 인력난에 시달리는 모순된 현실을 해결하는 것”을 대책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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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최태원 SK 회장과 문 대통령의 청년실업 해법이 만나고 있다. 최 회장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몇 해 전 그룹의 신입공채를 폐지하고 중소기업 근무나 창업 경험이 있는 경력자만 뽑는 방안을 구상했다. 하지만 그룹 인사파트에서 “우리만 좋은 인재를 놓친다”고 펄쩍 뛰었다. 취업 희망자들도 “왜 우리만 고생해야 하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최 회장은 일단 물러섰지만 속으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필자에게 “다른 대기업들도 신입 공채를 폐지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대기업이 최고의 인재를 독점하는 기득권을 포기하면 결과적으로 청년들이 갈 만한 일자리가 확 늘어날 것이라는 이타적인 발상이었다.

물론 최 회장의 구상이 실현되려면 해결해야 할 복잡한 디테일이 많다. 기껏 키운 우수인재를 대기업에 보낸 중소기업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대기업 직원을 해당 중소기업에 한시적으로 파견하고, 가산점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우수한 경영 노하우를 익히게 될 것이다.

무거운 청년실업을 정부 혼자서 떠안고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08년 이후 21차례의 정부 대책이 돈만 날리고 모조리 실패했다. 그래서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한 문 대통령과 감옥 안에서 이타적 해법을 궁리했던 최 회장이 머리를 맞대는 것만으로도 뜻밖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두 사람은 빈부격차와 실업을 해결하는 사회적 기업의 가치에 대해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뜯어고치는 구조개혁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문 대통령은 “정부의 모든 정책수단을 총동원해서 중소·중견기업 취업자와 대기업 취업자 간의 실질 소득격차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꼭 필요한 처방이다. 일시적으로 돈을 뿌려 대는 소득보전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 정규직을 과잉보호하고 있는 노동계를 설득해야 한다. 그들과 대화가 되는 진보정권이 확실히 잘 할 수 있다.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지만 “노동운동의 대의에 따라 중소기업과 비정규직도 같이 살자고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쓴소리를 해야 한다. 정부 지원에 기대 연명하는 좀비 중소기업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청년실업 대란을 못 막으면 결혼과 출산에도 악영향이 미칠 것이다. 나라 전체가 가라앉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최태원 회장을 포함한 기업인과 무릎을 맞대고 상생의 해법을 모색하고, 노동계와도 가슴을 열고 담판을 지어야 한다.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도 직을 걸고 뛰어야 한다. 잘만 하면 노동개혁도 성공시키고, 빈사 상태인 중소기업도 살려 한국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그게 청년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