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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대통령의 구두, 부총리의 가방…눈길 끄는 사회적 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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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의 세상만사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판다.' 노숙자·장애인 등의 재활을 돕는 미국의 사회적 기업 '루비콘 프로그램즈'의 슬로건이다. 냉철한 시장과 따뜻한 공동체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흔히 '착한 기업'이라 불린다. 그러나 좋은 일도 하면서 이익도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정부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표방하고 있다. 청와대가 발의하는 헌법 개정안에도 이런 내용이 반영돼 있다. 사회적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고, 나아가 시장 경제의 빈틈을 메워줄 것인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보기 위해 최근 화제를 모은 두 곳의 사회적 기업을 들여다봤다.

문 대통령 신어 화제 모은 '아지오' #폐업했다 재기…"장애인 채용 확대" #폐차 가죽 시트 재활용 '모어댄' #'개념 있는 소비' 젊은층서 각광 #정부 지원에도 대다수 업체 적자 #"필요한 기업" 인식부터 확보해야

2016년 5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당시 직함)가 광주 5.18 국립묘지에서 참배하고 있다.

2016년 5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당시 직함)가 광주 5.18 국립묘지에서 참배하고 있다.

#장면 1= 2016년 5월, 광주 5·18 국립묘지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낡은 구두 밑창이 사진에 잡혔다. 1년이 흘러 대통령 취임 후 소셜 미디어에서 이 사진이 새삼 화제가 됐다. '#이니 구두'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아지오' 브랜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일 경기도 성남 중원구의 아파트형 공장 선일테크노피아. 10층에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은 활기에 넘쳤다. 공장장 안승문(58)씨의 지휘 아래 직원 6명의 손길이 분주하다. 청각장애인 5명과 지체장애인 1명이다. 한쪽에는 구두 완제품이 포장과 배송을 기다리며 쌓여 있다. 유석영(56) 대표는 "수제화다 보니 하루 30켤레 밖에 못 만들고 있다"며 "밀린 주문을 소화하는 데만 한 달 가까이 걸릴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1급 시각 장애인이다.

'구두만드는풍경' 유석영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와 직원들이 작업장에서 만든 구두를 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회사의 구두를 신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남=최승식 기자

'구두만드는풍경' 유석영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와 직원들이 작업장에서 만든 구두를 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회사의 구두를 신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남=최승식 기자

 공장의 이력에는 좌절과 행운이 교차하고 있다. 파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장이던 유 대표는 2010년 장애인 일자리 확보를 위해 공장을 열었으나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문 대통령이 구두를 산 것은 폐업 1년 전인 2012년 9월이었다. 판로를 모색하던 유 대표는 파주가 지역구인 윤후덕 의원의 주선으로 국회회관을 방문해 홍보 겸 판매 행사를 했다. 이때 문 대통령(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에게 맞춰 준 구두가 몇 년 뒤 사진에 찍히고, 이 사진이 1년 뒤 화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지난해 10월 협동조합을 다시 만든 것은 이런 행운 덕분이었다. 재기에 필요한 자금 4억원은 펀딩과 차입금, 선주문 대금 등으로 조달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중소벤처기업부 출범식에서 문 대통령과 5년 만에 만나 덕담을 들었다. 지난달 1일 공장 재가동식에는 홍보 모델을 자처한 유시민 작가, 가수 강원래와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구두만드는풍경 안승문 공장장이 구두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남=최승식 기자

구두만드는풍경 안승문 공장장이 구두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남=최승식 기자

 -어렵게 문을 다시 열었다. 소감은
 "한번 실패했다 재기한 사업이라 부담이 더 크다. 작년 11월부터 받아놓은 선주문이 수백 켤레 돼 이를 소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하루 20켤레 가까이 새 주문이 들어오지만, 당분간은 속도를 내는 대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실패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파주 공장 때 제품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신제품 개발이 받쳐주지 않아 문을 닫았다. 사회적 기업을 시작할 때 감성적 접근만으로 덤벼들면 안 된다. 시장은 냉소적이고, 관용이 없다. 과학적이고 세밀한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외부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자립을 다지자는 뜻에서 슬로건을 '대통령의 구두'에서 '친구보다 더 좋은 구두'로 바꿨다."
 -앞으로 목표는
 "매출 16억원이 손익분기점인데, 올해 20억원 매출이 목표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비영리법인이라 이익은 조합원 배당 대신 조합 발전을 위해 써야 한다. 설립 취지에 맞게 현재 6명인 장애인 고용을 올해 안에 12~13명까지 늘리고 싶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SK 본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최태원 SK 회장으로부터 사회적기업 모어댄에서 만든 백팩을 전달받고 있다. [뉴시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SK 본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최태원 SK 회장으로부터 사회적기업 모어댄에서 만든 백팩을 전달받고 있다. [뉴시스]

# 장면2 = 지난 14일 '혁신 성장 현장 소통' 간담회.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최태원 SK회장에게서 가방 하나를 건네받았다. SK이노베이션이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모어댄에서 폐자동차 가죽 시트를 재활용해 만든 제품이다. 김 부총리는 25만5000원을 내고 이 가방을 구매했다.

 모어댄 최이현(37) 대표는 "사진이 보도된 뒤 하루 15개 정도던 가방 주문이 서너배로 늘어나면서 해당 모델이 완판됐다"며 "30~40대 소비자를 중심으로 '개념 있는 제품'으로 인식되면서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모어댄 최이현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직원 및 고객들과 함께 가죽시트를 수거하는 폐차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모어댄 제공]

모어댄 최이현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직원 및 고객들과 함께 가죽시트를 수거하는 폐차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모어댄 제공]

 최 대표가 사업을 구상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귀국 후 연구 개발에 1년 반을 매달렸다. 도약의 결정적 계기는 대기업의 도움이었다. SK이노베이션의 사회적 기업 지원 프로그램 '프로보노'의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창업자금 1억원과 마케팅·홍보 등의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었다. 2015년 6월 회사를 만든 후 전국의 폐차장을 찾아다니며 고급 자동차의 가죽을 걷어 왔다. 20여개의 제품 모델을 개발한 뒤 카카오 온라인스토어로 판로를 뚫었다.

폐자동차 가죽 시트를 재활용하기 위해 수거하는 모습

폐자동차 가죽 시트를 재활용하기 위해 수거하는 모습

 방탄소년단 리더 랩몬스터와 방송인 강호동씨가 메고 다니는 가방으로 알려지면서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20명의 직원 중 13명을 경력 단절 여성으로 채용하는 등 취약 계층 고용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 대표는 후배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좋은 뜻으로 사회적 기업을 시작하지만, 1~2년을 못 버티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되려면 수익 모델과 판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모어댄 전시 제품들

모어댄 전시 제품들

 구두만드는풍경과 모어댄의 성공(혹은 잠정적 성공)은 전략, 대기업과 사회의 관심과 지원, 행운이 어우러진 결과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의 현주소에 비춰봤을 때 두 기업은 일반적이라기보다는 예외에 가깝다. 고용노동부는 일정 조건을 갖춘 사업체를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해 5년간의 지원을 해준다. 인증업체는 현재 1900여개에 이르며, 이들이 고용하는 인력은 4만명에 가깝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일자리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사회적 기업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를 적극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금융·판로·인력 지원을 확대해 취약계층에 대한 안전판을 늘리고, 일자리도 늘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2015년 고용부 인증을 받은 사회적 기업 1506곳 중 흑자를 내는 곳은 24.4%(356곳)에 불과했다. 상당수는 직원 인건비조차 스스로 조달하지 못해 기업으로서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사회적 기업을 일자리 창출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철학 부재'라고 비판한다. 양준호 인천대 사회적경제연구센터장은 "사회적 기업은 시장경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회 문제를 '사업적'으로 해결하는 조직"이라며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회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출자자·소비자·재료공급자 등의 욕구를 사회적 기업의 활동과 연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경제적 기반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이런 고민 없이 재정 지원만 퍼붓는 것은 사회적 기업의 자생력을 해치고, 결국 '후진 일자리'만 만들어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