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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동전 던지기로 결정된 한양 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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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⑮

“무슨 물건으로 점을 칠까?” (태종)
“종묘 안에서 척전(擲錢)할 수 없으니,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첨)
“시초가 없고, 또 요사이 세상에는 하지 않는 것이므로 알기가 쉽지 않으니, 길흉(吉凶)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태종)
“점괘의 글은 의심나는 것이 많으므로, 가히 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김과)
“그래도 여러 사람이 함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다. 또한 척전은 속된 일이 아니고, 중국에서도 있었다. 고려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는가?”
“역시 척전을 썼습니다.” (조준)
“그와 같다면, 지금도 척전이 좋겠다.” (태종)
(『태종실록』 4년 6월 10일)

고려시기에 제작된 동전

고려시기에 제작된 동전

척전과 시초는 모두 점을 치는 방법입니다. 척전은 동전 던지기, 시초는 풀을 뽑아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1404년, 조선이 건국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수도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했습니다. 이성계가 1394년 한양 천도를 강행했지만, 불과 5년만에 정종이 다시 개경으로 뒤집었습니다. 태종도 개경에서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개경파와 한양파의 대립은 계속됐고, 태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척전을 선택했습니다.

점을 치기에 앞서 태종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 문제를 재차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 송도(松都, 개경)와 신도(新都, 서울)와 무악(毋岳, 오늘날 서울 신촌 연세대 일대)을 고(告)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吉)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災變)이 있더라도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태종실록』 4년 6월 10일)

그 결과, 신도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과 무악은 모두 '2흉 1길'. 600년 수도 한양의 탄생 순간입니다.
그리고 태종이 공언한대로 이 논란은 영원히 종식됐습니다.
신생 국가의 기틀을 다져야 했던 태종은 후세에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것 같습니다.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 [사진=SBS]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 [사진=SBS]

수도인 듯 수도 같은 수도 아닌 한양

건국 시조의 강력한 의지로 선택됐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한양의 운명은 툭하면 기로에 놓였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왕과 일부 최고위층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관료는 고려시대 그대로였습니다. 비록 몸은 한양에 와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옛 수도인 개경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500년 가까이 수도였던 개경이 이제 막 수도로 건설된 한양보다 인프라가 풍부한데다 자신들의 인적·물적 기반이 남아있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새 왕조 역시 여전히 국가 제1 도시인 개경의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해야 했기에 적당한 '회유책'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조선은 한양을 수도, 개경을 제2수도인 부도(副都)로 하는 양경제를 실시하기로 합니다. 국제무역항 벽란도가 인접하고 경제 인프라가 발달한 개경은 상업 중심지로, 궁궐과 종묘사직을 둔 한양은 정치-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개념이 이때도 등장했습니다.

한양도. 궁궐·종묘·사직이 완공된 한양의 모습. 1822년 목판본.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한양도. 궁궐·종묘·사직이 완공된 한양의 모습. 1822년 목판본.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하지만 정종이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되돌리자 분위기는 개경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어 버립니다. 정종이 개경 환도를 주장했을 때 조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경이 수도가 되자, 한양은 거꾸로 제2수도인 부도(府都)가 됐습니다.

심지어 한때 부도로서의 존재마저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각종 제례 의식 때마다 종묘·사직을 찾아 한양을 오가는 것이 불편했던 태종은 개경에 종묘와 사직을 새로 짓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모든 조건이 앞서는 개경이 조선의 수도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겠죠.

2017년 5월 7일 종묘에서 열린 종묘제례. 조선왕조 역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제사가운데 가장 규모가큰 행사다. 이때문에 개성과 한양을 오가야 했던 태종은 아예 종묘를 개성에 새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했다. [중앙포토]

2017년 5월 7일 종묘에서 열린 종묘제례. 조선왕조 역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제사가운데 가장 규모가큰 행사다. 이때문에 개성과 한양을 오가야 했던 태종은 아예 종묘를 개성에 새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했다. [중앙포토]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개국공신 세력의 리더격인 조준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양은 태조가 창건한 도읍지이고 개성은 인민의 생업이 안정된 땅이므로, 양경(兩京)을 폐지할 수 없다"며 결사적으로 버텼습니다. 서울로서는 명예시장 정도 고려해 봄직 하지 않을까요?

최영 숙청의 빌미가 된 한양 천도

흥미로운 것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최영 세력을 숙청할 때 죄목으로 꺼내든 것 중 하나가 바로 ‘한양 천도’라는 점입니다. 천도를 추진해 민심을 뒤흔들고,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 한양 천도설을 놓고 개경의 민심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쿠데타 세력인 이성계는 한양 천도의 ‘수괴’를 처단해 민심을 얻을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과 6년 후 이성계야말로 한양 천도를 강행하는 '수괴'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 개성 주민들은 상상도 못했겠죠.

개성 남대문과 고려 성균관 : 남대문은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문루엔 옮겨온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개성 남대문과 고려 성균관 : 남대문은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문루엔 옮겨온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사실 한양 천도 논의는 이성계 세력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처음 제기된 것은 공민왕 5년입니다. 궁궐 공사까지 진행했는데 4년 뒤 태묘에서 점을 친 결과가 좋지 않아 중단됐습니다.
이후 1381년(우왕 7년)에도 서운관(풍수지리 등을 담당하는 부서)의 건의로 천도가 다시 논의됐는데,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인임의 반대로 무산됐다가 이듬해 재논의가 진행됐습니다.

KBS 사극 '정도전'의 한 장면. 위화도 회군 후 개성에서 맞부딪힌 이성계(유동근·왼쪽)와 최영(서인석)의 처절한 격투신.[사진=KBS]

KBS 사극 '정도전'의 한 장면. 위화도 회군 후 개성에서 맞부딪힌 이성계(유동근·왼쪽)와 최영(서인석)의 처절한 격투신.[사진=KBS]

그렇다면 우왕 때 최영은 정말 천도를 주도했을까요.
평생 무장으로 싸워왔고 개성에서도 입지가 탄탄했던 그가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를 주도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하지만 천도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내놓긴 했습니다. 우왕은 최영과의 연대를 통해 정계 재편을 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무렵 이인임 세력에게 눌려있던 양측이 정치지형을 바꾸기 위해 천도를 추진하려 했을 여지는 충분합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한양은 최고의 길지였을까 

격동의 시기였던 고려 말에 한양 천도설이 계속 등장한 것은 이른바 『도선비기』에 전해진다는 ‘삼경순어설(三京巡御說)’ 때문입니다. 왕이 세 곳의 수도에서 고르게 정무를 보면 국운이 트인다는 설입니다.

삼각산 도선사에 있는 도선대사 진영 [사진=삼각산 도선사]

삼각산 도선사에 있는 도선대사 진영 [사진=삼각산 도선사]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의 땅에는 삼경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서울)이 남경(南京)이 되며, 평양이 서경(西京)이 된다. 11~2월에는 중경에 있고, 3~6월에는 남경에 있으며, 7~10월에는 서경에 있으면 36국이 천자에게 조회할 것이다.” (『고려사』 열전35‧방기‧김위제 中)

3곳의 지기(地氣)가 모두 소진되지 않도록 돌아가면서 고르게 받으라는 것인데, 전형적인 '풍수지리+농경문화'의 사고이기도 합니다. 중세시대 3포식 농업도 지력을 소진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지요. 어찌됐든 고려의 창업과 개성 도읍을 점지한 것으로 알려진 도선의 영향력은 고려 내내 강력했습니다.

평양 대동문. 평양은 고려시대 3경 중 하나인 서경으로 지정됐다. [중앙포토]

평양 대동문. 평양은 고려시대 3경 중 하나인 서경으로 지정됐다. [중앙포토]

“판서운관사 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도선비기』에는 삼경순어의 설이 있습니다. 지금 변괴가 자주 나타나고…우물이 끓어오르고 물고기가 싸웁니다. 청컨대 도읍을 옮겨 재난을 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우(우왕)가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고려사』 열전 39‧간신2‧이인임 中)

그렇지만 수도의 입지로는 개성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 확고한 분위기였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한양을 추천하며 서운관 관원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한양은 개성 다음으로 좋은 곳”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정도전조차 “(수도 자격을 갖춘 곳은) 동경(경주)·서경(평양)·완산(전주)·송경(개경)이 있다”며 한양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도성도. 한양을 둘러싼 주요 산세를 자세히 기록했다. [사진=서울시한양도성도감]

도성도. 한양을 둘러싼 주요 산세를 자세히 기록했다. [사진=서울시한양도성도감]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새 수도로 추천된 한양·무악·계룡이 하나같이 개경 이남이라는 점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14세기 이후 논농사가 발전하면서 그 중심인 충청·경상·전라, 소위 하삼도 지역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대했습니다. 하삼도의 농업경제발전으로 이 지역 지배층이 신진 세력으로 부상하는 기미가 보였고, 새 도읍도 남쪽으로 향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종이에 목판 채색.   [사진제공=옥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종이에 목판 채색. [사진제공=옥션]

천도는 NO, 양경제나 삼경제는 OK

하지만 수도를 바꾸는 천도는 늘 저항이 뒤따랐습니다.

고려 공민왕이나 우왕의 한양 천도도 시도에 그쳤고,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철저하게 궤멸됐습니다.
조선 시대에 천도 시도는 광해군의 교하 천도가 유일합니다. 이 또한 절대적 지지세력인 북인이 집권했음에도 무위에 그치고 맙니다.
오직 무력을 독점했던 이성계만 가까스로 성공시켰을 뿐입니다.

연세대학교는 정시에서 일반전형으로만 선발하고 일반계열·국제계열·체능계열·예능계열 중 하나를 선택?지원할 수 있다. [사진제공=연세대]

연세대학교는 정시에서 일반전형으로만 선발하고 일반계열·국제계열·체능계열·예능계열 중 하나를 선택?지원할 수 있다. [사진제공=연세대]

대부분의 천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수도가 단순히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도는 단지 왕궁을 옮기고 지배층의 거주지를 옮기는 문제만이 아니라, 물자 유통과 방위체계 등 여러 사회적 시스템을 다시 재편하는 커다란 변화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강력한 왕권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천도는 성공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종시 전경

세종시 전경

반면 수도 외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보조적 수도를 별탈없이 운영한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고려시대 3경제가 대표적입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수도인 개경 외에도 평양을 서경, 경주를 동경으로 지정했습니다. 서경은 고구려의 계승의지를, 동경은 패망한 신라의 민심 회유를 위한 정치적 고려였습니다.

앞서 보았듯 조선도 한동안 양경제를 유지했습니다. 태종 이후 세조·성종도 개성에 머무르며 정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에서 인사를 다룬 이전(吏典)에 따르면, 개성의 관료는 지방직인 외관(外官)이 아니라 중앙직인 경관(京官)이었습니다. 개성은 종2품 유수(留守)를 둔 특별 행정지구로 지정되어 있었구요.

경기도 수원화성 행궁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경기문화재단]

경기도 수원화성 행궁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경기문화재단]

정조가 건설한 화성행궁도 천도가 아니라 제2 수도를 염두에 둔 구상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정조가 화성행궁을 건설하며 한 번도 천도를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정조가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화성행궁에 머물며 상왕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참고로 화성행궁 건물의 하나인 낙남헌(洛南軒)도 제2 수도를 염두에 뒀다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이 명칭은 한나라 고조가 양경(兩京)의 하나였던 낙양에서 주연을 베풀었던 것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처럼 양경제가 무리없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과연 실효가 있었는지를 따져본다면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북공심돈.수원화성

서북공심돈.수원화성

개헌안 속 수도 규정의 의미

최근 청와대가 내놓은 개헌안에 수도 규정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실패한 행정수도를 재추진하려는 사전 작업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21일 “국가 기능 분산이나 정부부처 등의 재배치 필요가 있고, 나아가 수도 이전의 필요성도 대두될 수 있으므로 수도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며 가능성을 열어뒀습니다.

만약 청와대의 구상처럼 '서울-수도, 세종-행정수도'라는 양경제가 실시된다면 조선 초기 이후 약 500년 만에 실시하는 셈이 됩니다. (대한제국 시절 1903년 서울-평양 양경제를 실시하자는 건의가 수용돼 50만냥을 들여 평양에 궁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으로 흐지부지 됐습니다.)

 개성 만월대 출토 현장. 470여년간 고려의 희로애락을 지켜본 궁궐이지만 조선 건국 후 한양에 수도를 내준 뒤엔 급격히 쇠락했다. 지금은 터와 주춧돌 정도만 남아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연합뉴스]

개성 만월대 출토 현장. 470여년간 고려의 희로애락을 지켜본 궁궐이지만 조선 건국 후 한양에 수도를 내준 뒤엔 급격히 쇠락했다. 지금은 터와 주춧돌 정도만 남아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연합뉴스]

개성-한양의 역사가 말해주듯 명칭이 무엇이든 수도는 실제 권력이 머무는 곳에 자리잡게 되고, 나머지 지역은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또한 이성계가 최영의 숙청 사유로 내세운 것처럼 수도 이전을 추진할 때 파생되는 민심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청와대의 묘안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윤경진 『고려 문종 21년 南京 설치에 대한 재검토-공양왕 2년 한양 천도의 합리화』, 오종록 『왜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했나?』, 김윤주 『조선 초기 遷都와 移御의 정치사-수도 한양의 위상 강화 과정을 중심으로』, 고동환 『조선시대 한양의 수도성-도시의 위계와 공간표현을 중심으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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